[한국기독역사여행] “우상에는 절하지 않는다”… 옥중서도 신앙 절개 지켜

제주중앙교회는 1951년 6·25전쟁 피난민이 육지에서 몰려들면서 조직 교회로 뿌리를 내렸다. 당시 피난민은 해군 상륙작전함(LST) 등을 타고 입도했다. 그들은 천막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께 감사했다. 지금의 교회는 2013년 신축한 것으로 구원 방주와 LST를 형상화했다.
 
현 제주시 오라벌 제주중앙교회 정원 한쪽에 자리한 도인권 목사 목회 기념비. 그는 제주에 7개 교회를 개척했다.
 
도인권 목사 (1880~1969)
 
서울 강북삼성병원 경교장 2층 테라스에서 북행 이유를 설명하는 김구(가운데). 왼쪽이 도 목사로 추정된다.
 
서울 강북삼성병원 내 경교장. 김구 선생의 비서이기도 했던 도인권 목사는 1948년 김구의 남북협상을 위한 북행을 만류하기도 했다.
 
교회는 당시 제주읍 내 신사 터에서 시작했다.
 
도인권 목사 목회 당시 석축 예배당을 헌당(1955년)한 후 입구에 세웠던 현무암 교회 간판. 2013년 성전 이전과 함께 옮겨졌다.
 
지난달 29일 제주중앙교회 박종호 담임목사가 옛 교회 사진을 가리키며 교회 역사와 도인권 목사의 삶을 설명하고 있다.


지난주 독립운동가 도인권 목사의 삶을 찾아가는 길은 힘들었다. 무엇보다 봄 제주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비행기 표 끊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표 구매사이트의 오류로 오전 6시55분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5시간의 공항 대기 끝에 겨우 제주행 비행기에 탈 수 있었다. 그러니 비행기도 없던 시절의 제주지역 복음 전파는 ‘선교’라고 칭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도인권은 6·25전쟁 직후 기독교대한감리회 제주선교 개척자였다. 제주중앙교회 등 7개 교회를 세워 제주에 웨슬리 신학을 전파했다. 그 공로가 제주시 제주중앙교회 뜰에 ‘감리사 도인권 기념비’로 남아있다.

도인권은 사실 한국교회를 넘어서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를 기리는 흔적은 제주의 기념비가 유일하다. 그는 구한국 장교, 독립운동가, 교육가, 목사 등으로 죽는 날까지 신앙과 민족을 위한 인물이었음에도 한국교회는 감리회 제주 선교사쯤으로 여긴다.

‘왜놈 교회사(敎誨師)가 일요일 불상 앞에 각 수인으로 하여금 머리를 숙이고 예불하도록 명하니 수인들이 마음속으로는 천황 급살을 빌면서도 겉으로는 머리를 숙였으되, 수백 명 가운데 도인권 한 사람만이 머리를 까딱 아니하고 앉았다. 간수가 질문해도 도는 자기는 야소교도이므로 우상에 절하지 않는다 하였다.’(김구 자서전 ‘백범일지’ 중)

도인권은 김구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 일제가 꾸민 소위 ‘안악사건’으로 10년형을 받은 도인권이었다. ‘백범일지’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하나님의 진정한 종이요 예수의 제자였다. 일제강점기 강압에 못 이겨 신사참배를 했던 목회자와 성도들 대개는 고개 숙인 채 천황의 급살을 빌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인권처럼 신앙을 지키지 못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도인권은 평안남도 용강 사람으로 구한국군 무관학교 군사특과에 들어가 수료 후 교관에 임명됐다. 하지만 1907년 일제에 의해 우리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울분의 세월을 산다. 그는 배우고 힘을 기르는 것만이 민족이 살길이라고 판단하고 교육운동 ‘학무회’에 참여, 황해도 재령 양원학교 등에서 민족 계몽운동을 펼친다. 고향에 충일학교와 사범강습소를 설립하기도 하고 황해 안악 양산학교, 재령 문창학교 등에서도 체육 과목을 중심으로 후대를 일깨웠다. 김구, 김홍량 등 황해도 지방 기독교 선각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1910년 안악장로교회에서 밀러(한국명 민노라)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복음을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도 목사를 ‘아우님’이라 부른 백범

도인권의 삶을 좇아 제주중앙교회를 찾게 된 것은 바랜 ‘백범일지’(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刊·1971년 판)에 나타난 그와 관련한 대목 때문이었다. 백범이 도인권을 거론한 첫 문장은 이러하다.

‘여기서 나는 동지 도인권을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다.’

백범은 ‘도인권이 노백선 김희선 이갑 등과 장령(將領)이 되어 정교(3품 무관) 자리까지 올랐다가 군대가 해산되매 향리에 있는 것을 양산학교 체육선생으로 연빙하여 와서 우리의 동지가 되어 어떤 사건(안악사건)으로 십 년의 징역을 받고…’라고 서술한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도인권은 모범 재소자에게 주어지는 상과 그에 따른 가석방조차 거부한다. 죄를 짓지 않았는데 가두어 놓고 왜 가석방이냐는 것이다. 일제는 그의 믿음에 혀를 내두르고 만기 출소시킨다.

백범은 또 ‘신해년 초닷샛날(1911년) 새벽, 내가 아직 기침도 하기 전에 왜헌병 하나가 내 숙소인 양산학교 사무실에 와서…나를 헌병분견소로 데리고 간다. 가 보니 벌써 김홍량 도인권 이상진 등이 나 모양으로 불려왔다’고 적었다. 그들이 서울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동지이자 자선가인 신석충 진사가 재령 철교를 지날 때 투신했다는 대목에선 목이 멘다. 그들은 그렇게 끝까지 저항했다.

이후 목사가 된 도인권은 1920~30년대 남감리회 외사청 소속으로 만주 및 시베리아에서 복음을 전했다. 이때 소련 공산정권의 해악을 온몸으로 겪었다. 시베리아 선교가 불가능해지자 중국 훈춘 동흥진을 선교기지로 삼았다. 사회주의는 또 다른 우상일 뿐이었다. 이 기억은 훗날 김구의 평양행을 말리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해방됐다. 그런데 남북이 갈릴 위기에 처했다. 1948년 4월 19일 아침 서울 경교장. 김구는 김일성과의 담판을 위해 북행키로 한다. 이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경교장을 둘러쌌다. 김구는 “나에게 마지막 독립운동을 허락해 달라. 이대로 가면 한국은 분단될 것이고 서로 피 흘리게 될 것이다”라며 호소했다. 도인권도 이때 만류했다. 평소 ‘아우님’ 또는 ‘도 목사’로 부르던 김구는 “당신이 이럴 수 있나. 내 심정을 이토록 몰라주나”라고 호통을 쳤다. 도인권은 교우들을 동원해 “선생님이 그들의 수작에 넘어갈 것”이라며 말렸다. 그러면서 김구 아들 김신과 비서 선우진에게 “평양에서 못 돌아오면 너희들이 책임질 거냐”며 호령호령했다. 그런데도 김구는 결국 삼팔선을 넘었다. 서로의 신앙과 충정을 두 사람이 서로 모를 바는 아니었다. 이듬해 6월 김구는 바로 그 경교장에서 흉탄에 서거했다. 도인권은 그의 장례를 집행했다.

신사 터 위서 시작한 제주 천막교회

어렵게 도착한 제주중앙교회. 하늘이 맑았고 구원 방주 모양의 예배당은 하늘바다에 떠 있는 듯이 아름다웠다. 2014년 국민일보가 선정한 교회건축상을 수상한 건축물로 2013년 이곳 제주시 오라벌에서 입당예배를 올렸다. 이 교회는 6·25전쟁 발발 이듬해 제주도로 피난 온 감리회 성도들이 도인권을 지도자로 내세워 설립했다. 제주읍 일도동 일제 신사 터 위에 천막을 치고 ‘제주읍교회’라 칭했다.

당시 제주의 성도에게 도인권은 요셉과 같은 중앙의 거목이었다. 하지만 도인권은 독립운동가라는 계관을 버리고 성도들, 특히 청년들에게 “광음을 아끼라 때가 악하느니라”를 외쳤다. 자신이 77년을 살았으나 정작 하나님을 위해 제대로 복음 전한 시간은 16년에 불과했고 그것도 매년 60일에 지나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는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전도했다.

백범은 도인권에 대해 정기가 바른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도인권의 예수 정신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데 소홀했다는 감을 지울 수 없었다.

제주=글·사진 전정희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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