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랜만에 ‘가수 비’가 아닌 ‘배우 정지훈’으로 대중 앞에 섰다. 한국영화 출연은 ‘알투비: 리턴 투 베이스’(2012) 이후 7년 만. 그의 표정에는 옅은 기대감과 짙은 긴장감이 묻어났다. 27일 개봉한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의 타이틀롤을 맡은 정지훈(37)을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공백이 왜 길어졌는지 말씀드릴게요(웃음). 가수와 배우 활동을 병행하다 보면 단점이 있어요. 가수들은 보통 1년 계획을 세워놓는데 그 사이에 영화 제안이 들어오면 일정상 못 하게 되는 경우가 많죠. 이번 영화는 스케줄이 비어있는 시기에 때마침 시나리오를 받았어요.”
제작자로 참여한 배우 이범수가 직접 제안을 건넸다. 영화는 일제강점기 일본이 개최한 전조선자전차대회에서 일본 선수들을 제치고 조선인 최초로 우승한 실존 인물 엄복동의 이야기. 당대 스포츠 영웅이었으나 후대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에 대한 호기심이 그를 자극했다.
순박한 물지게꾼에서 늠름한 자전차 선수로 거듭나는 서사를 그려내기 위해선 캐릭터 성격을 구상하는 게 먼저였다. 정지훈은 “자전거 타기를 좋아하는 ‘단순무식 순수청년’이라는 설정으로 촬영에 들어갔다”며 “장면별로 도표를 만들어놓고 세밀한 변화를 표현해나갔다”고 설명했다.
특유의 성실함은 이번 작품에서 역시 빛을 발했다. 촬영 3개월여 전부터 국가대표 사이클 선수들이 받는 훈련을 받았고, 극 중 자전거 경주 장면을 전부 직접 소화했다.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었어요. 완성본을 보는데 고생했던 기억들이 떠올라 울컥하더라고요.”
개봉 전 선공개된 영화는 호의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다. 작품의 완성도가 다소 떨어지는 데다 애국심을 자극하는 ‘국뽕’ 장면이 남발됐다는 지적이 나왔다. 특히 엄복동과 독립운동가 형신(강소라)의 러브라인은 억지스럽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곤란한 질문에도 그의 답변은 솔직 담백했다. 정지훈은 “각 캐릭터 관계 설명을 다 넣으면 러닝타임이 3시간 가까이 되더라. 스토리가 더 늘어질 수 있다는 판단으로 감독님께서 편집하신 것 같다”면서 “내 입장에선 열심히 연기하는 게 최선이었다”고 털어놨다.
특히 1920년 경성시민대운동회에서 일본 측 만행에 항의하며 우승기를 꺾은 엄복동이 일본인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자 조선 관중들이 몰려나와 그를 보호하는 장면을 두고 말이 많았다. 그는 “그 장면은 기록에 남은 사실이다. 그것까지 나쁘게 해석하진 말아주셨으면 한다”고 부탁했다.
데뷔 22년차인 정지훈은 자신의 정체성을 “열심히 하는 모습”이라고 정의했다. “대중이 저를 좋아해 주신 것도 그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무대도, 연기도, 예능도 참 열심히 하는구나’ 싶으셨던 거죠. 저의 그런 아이덴티티를 잃고 싶지 않아요.”
2017년 배우 김태희(39)와 결혼해 딸을 둔 그는 가장이 된 이후 적잖은 변화를 겪고 있다. “가벼워졌어요. 그동안 고수해 온 열정, 노력, 지독함 같은 것들을 많이 놓게 되더라고요. 아마 ‘자전차왕 엄복동’이 제가 지독하게 임한 마지막 영화가 아닐까 싶어요. 근데 또 모르죠. 다음에도 칼을 갈고 나올지(웃음).”
앞으로도 촬영장과 무대를 부지런히 오갈 계획이다. 정지훈은 “독립·예술영화에도 출연해보고 싶다. 가볍고 코믹한 작품이면 더 좋겠다”면서 “배우라는 타이틀을 단 이상, 늘 의외성이 있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나. 장르나 규모에 상관없이 하고 싶은 걸 꾸준히 해나갈 생각”이라고 했다. 올 연말에는 새 앨범을 발매하고 콘서트도 열 예정이다. 가요계 선배로서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