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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코너-노석철] 사마광의 항아리, 김정은의 선택



요즘 중국에선 ‘항아리를 깬 사마광(사마광잡항)’ 고사가 다시 회자된다. 자치통감을 쓴 송나라 정치가·학자 사마광의 어린 시절 이야기다. 뜰에서 술래잡기를 하는데 한 아이가 큰 항아리에 올라갔다가 빠졌다. 아이가 물이 가득 찬 항아리에서 허우적거리는데 친구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기만 했다. 이때 사마광이 돌로 항아리를 깨뜨려 친구를 살려냈다. 만약 비싼 항아리를 깼다가 덤터기를 쓰는 걱정을 하느라 주저했다면 친구를 구할 수 없었다.

푸젠성 푸저우에 사는 자오위(21)씨는 한 여성을 성폭행 위기에서 구했다가 오히려 폭행범으로 몰려 옥살이를 했다. 지난해 말 아내의 출산을 앞두고 집에 있는데 아래층에서 “강간한다”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곧바로 내려가자 리모씨가 여성 A씨의 목을 조르고 주먹으로 때리고 있었다. 자오씨는 리씨와 서로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리는 난투극을 벌였다. 경찰이 도착하자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3일 후 병원에서 아내의 출산을 기다리는 자오씨를 경찰이 연행해 갔다. 리씨에게 상해를 입힌 혐의라고 했다. 그는 아내 출산도 못 보고 14일간 구금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났다. 게다가 고의상해 혐의로 징역 4년형에 최대 60만 위안(1억원)을 배상해야 할 처지가 됐다. 사연이 알려지자 여론이 들끓었다. ‘내가 성폭행을 당해도 아무도 안 도와줄 것이다’ ‘누가 항아리를 깨려 하겠느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결국 검찰은 자오씨를 불기소 처분했다.

최근 샤먼의 한 지방정부는 ‘사마광의 항아리 깨기 벌금 20위안’이란 법률 홍보 포스터를 만들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항아리 깨기를 ‘임의로 훼손하는’ 폭력 행위로 분류한 것이다. 한 공무원의 무지가 빚은 해프닝이지만 자오위 사건 직후여서 비난이 거셌다. 사마광의 격옹구아(擊甕救兒) 고사는 많은 교훈을 준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버려야 한다’는 염일방일(拈一放一)도 담겼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베트남에서 2차 정상회담을 갖는다. 의제는 꼬여 있지만 결국 핵과 경제라는 두 단어로 압축된다. 북한은 체제 유지를 위해 핵을 선택할 것이냐, 핵을 포기하고 경제발전에 올인할 것이냐는 기로에 서 있다. 두 가지를 모두 갖는 것은 국제사회가 용인하지 않는다. 앤드루 김 전 CIA 코리아미션 센터장은 최근 “내 아이들이 평생 핵을 지고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김 위원장의 말을 전했다. 그러면서 그는 “북한이 여전히 핵보유국으로 인정받기를 원하고, ‘김씨 가문’의 지배를 보장하기 위해 오래 지속하는 평화를 바란다”고 분석했다. 이를 두고 북한이 핵보유와 경제발전을 모두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핵보유국 인정’이 협상 카드일 수 있지만 수십년간 온갖 제재와 궁핍을 견뎌내고 만들어낸 핵인데 쉽게 포기하리라는 발상 자체가 순진한 생각인지 모른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실질적 진전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며 비핵화 협상의 난항을 예고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영변 핵시설 폐기와 비핵화 로드맵 제시 등 실질적인 비핵화 조치를 내놓고, 미국이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재가동 등으로 호응한다면 우리로선 일단 성공적인 결과다. 하지만 미국 언론과 야당은 일방적인 ‘대북 퍼주기’를 우려하며 비판적인 분위기다. 벌써부터 김 위원장이 전용열차로 베트남까지 가는 파격에 대해 비핵화 협상의 본질을 흐리려는 ‘쇼’라고 하는 비판도 나온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별 성과를 못 낸다면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내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김 위원장에 대한 신뢰를 접어야 할 수도 있다. 이는 김 위원장에게도 정상국가의 리더로 자리 잡을 기회를 놓치는 결과가 된다. 시간이 흐르고 있다. “김정은은 좋은 협상 상대”라고 하는 트럼프 행정부도 벌써 임기의 반환점을 돌았다. 트럼프 대통령 임기 내 성과를 못 내면 북핵 협상은 또 원점으로 돌아가고 북한은 다시 고립에 빠질 수 있다. 이제는 누군가 먼저 돌을 던져 항아리를 깨야 할 때가 됐다.

베이징=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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