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적 운명과 인간의 대결… 황정민 연기 압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비운의 영웅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 ‘오이디푸스’의 한 장면. 오이디푸스 역을 맡은 황정민(왼쪽)과 크레온 역의 최수형. 샘컴퍼니 제공


이런 비극이 또 있을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해 아이들을 둔 남자, 고대 그리스신화 속 비운의 영웅 오이디푸스의 얘기다.

‘국민배우’ 황정민 표 ‘오이디푸스’(연출 서재형)가 지난달 29일부터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무대에 오르고 있다. 지난해 황정민이 10년 만에 연극 무대로 복귀한 작품이자 흥행에 성공했던 ‘리처드3세’ 제작진이 다시 뭉쳐 화제가 됐었다.

소포클레스가 약 2500년 전에 쓴 원작은 비극의 원류로 꼽힌다. 테베의 왕 라이오스와 왕비 이오카스테 사이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한다’는 신탁을 받고 산에 버려진 오이디푸스의 삶을 다뤘다. 그는 태생의 비밀을 모른 채 이웃 나라 코린토스 폴리보스왕의 양자로 길러지고, 여행을 하던 중 스핑크스를 물리쳐 테베를 구하고 그곳의 왕이 된다.

연극은 원작에 있던 장대한 영웅의 모험담을 과감히 쳐냈다. 대신 오이디푸스가 테베의 왕이 된 시점부터 고통스러운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과정까지를 집중해 그려냈다.

극은 이로써 서사의 중심축을 관객들에게 더욱 선명히 내보인다. 운명과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 사이의 대립이다. 숙명은 위대한 왕 오이디푸스를 세상에서 제일 추하고 더러운 인간으로 전락시킨다.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목동에게 출생 비화를 들은 그는 아내이자 어머니인 이오카스테가 죽음을 택하자 괴로움에 몸부림치다 자신의 눈을 찌른다.

커다란 고통 앞에 선 인간은 쉽게 좌절하거나 가혹한 운명을 탓하며 체념하기 마련이다. 어쩔 수 없다고 타협할 때 절망은 감옥이 돼 우리를 오랜 시간 가둬둔다.

연극은 단순히 절망을 그리는 데서 끝내지 않는다. 오이디푸스는 가장 비참한 순간에 운명 속으로 한 걸음을 내디디며 역설적이게도 가장 영웅적인 인물이 된다. 극의 피날레는 지팡이에 의지해 객석을 향한 힘겨운 걸음을 걷는 그에게 오랜 시간 조명을 비춰준다. 관객들은 느리지만, 한 걸음씩 천천히 나아가는 그의 모습을 보며 기묘한 희망을 느끼게 된다.

영화와는 또 다른 황정민의 연기를 보는 게 백미다. 그는 공연 내내 분노 좌절 슬픔 사이를 유연하게 오가며 몰입감을 극대화한다. 남명렬 박은석 배해선 정은혜 최수형 등 배우들 모두 자신이 맡은 역할 이상을 톡톡히 해낸다. 특히 남명렬은 극 속에 위트를 적절히 녹여내며 노련한 완급조절을 뽐낸다.

다양한 무대장치가 가능한 토월극장의 이점을 활용한 세트에선 서 연출가 특유의 꼼꼼함이 묻어난다. 회전하거나 오르고 내리며 눈 깜짝할 새에 새로 조성되는 무대 공간은 웅장함을 키우고, 서사를 한층 매끄럽게 풀어낸다.

100분이 금세 지나간다. “내 발아,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라고 계속해 외치는 오이디푸스의 말을 곱씹다 보면 어느새 나의 다음 발걸음을 곰곰이 고민하게 된다. 처절해서 더 깊은 희망으로 다가오는 아이러니한 이 연극에 우리는 한 번 더 같은 물음을 던지게 된다. 이런 비극이 또 있을까. 공연은 24일까지.

강경루 기자 ro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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