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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코너-노석철] 독립투사 없었으면 해방이 됐을까



님 웨일스는 ‘아리랑’ 서문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아리랑은 1941년 출간됐다. 당시 조선에 관한 최신 서적으로 아리랑이 유일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측근들은 나의 글을 주의 깊게 읽었고 대통령에게 자세히 보고를 올렸다고 알려왔다. 후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서한을 보내 나의 글을 통해 조선에 관해 알게 됐다고 고마워하며 시간을 내 만나고 싶다고 했다.” 일제의 쇠사슬에서 해방된 조국을 꿈꾸며 중국 혁명의 대열에 뛰어들었다가 반혁명죄와 간첩죄 누명을 쓰고 33세에 처형된 비운의 혁명가 김산. 중국 혁명에 기대어 조국 독립을 이루려 했던 그의 목숨 건 투쟁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의 삶은 기억 속에서 잊혀가던 한국의 존재를 미국 대통령에게 깊이 각인시켰다. 항일 투쟁을 했던 독립투사들은 그렇게 피로, 죽음으로 조국 해방의 밀알이 됐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누가 장난처럼 올려놓은 글을 봤다. ‘혹시 독립운동가들의 투쟁이 없었더라도 독립은 이뤄지는 게 아니었느냐’는 내용이었다. 연합군이 일본을 무너뜨리면서 자연스럽게 한국도 독립됐을 수 있다는 취지였다.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 들었다.

1910년 한·일 병탄 이후 35년 동안 일제의 지배를 받은 한국은 잊힌 존재가 되고 있었다. 당시 미국 최고위층에는 한국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루스벨트 대통령 등 미국 지도층이 아는 한국 관련 서적은 님 웨일스의 ‘아리랑의 노래’와 미국인 선교사가 쓴 책 정도가 전부였다. 대신 일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책은 차고 넘쳤다. 따라서 한국은 일제가 당연히 통치하는 미개한 민족 정도로 치부될 수 있었다. 만약 만주, 상하이, 시베리아, 연해주 등 곳곳에서 목숨을 걸고 대한민국의 존재를 알린 독립투사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1945년 광복을 맞이하지 못했을 수 있다. 상하이 푸단대 역사학과 쑨커즈 교수는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들이 목숨 걸고 싸우지 않았다면 강대국들은 한국이 부당한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라며 “그랬다면 일본이 패망할 때 한국을 그대로 지배하고 나머지만 반환했을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

독립운동가들의 삶은 고단했다. 가족들이 겪는 고초도 말이 아니었다. 취재 중에 임시정부가 거쳐 간 항저우 청태제2여관에서 일강 김철 선생의 사연과 맞닥뜨렸다. 전남 함평 출신의 일강은 상하이로 떠나 임시정부 외무장, 법무장, 국무위원을 지냈다. 일강도 부인과 쓰라린 이별을 했다. 일강은 상하이로 찾아온 부인에게 “나는 조국 독립을 위해 한 몸을 바쳤으니 더 이상 찾지도 기다리지도 말라”고 했다. 부인은 국내로 돌아와 “남편이 가족 걱정 없이 오직 독립운동에 전념토록 하려면 죽는 수밖에 없다”고 결심하고 소나무에 목을 매 숨졌다. 그 소나무는 ‘단심송’으로 남아 있다. 일강은 1934년 청태여관 구석진 방에서 지내다 폐렴에 걸려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백범 김구 선생은 상하이 영경방 3층 단칸방에서 다섯 식구가 함께 살았다. 부인 최준례 여사는 아들 신을 낳은 지 백일도 안 돼 계단을 내려가다 실족해 크게 다쳤다. 몸이 약하고 폐결핵까지 있었던 최 여사는 아예 거동을 못하게 됐다. 임시정부 살림을 챙겼던 정정화 여사는 “당시 형편이 어려워 환자를 병원에 입원시키지도 못하고, 갓난아기의 옷도 없어 내가 헌옷으로 만들어 입혔다”고 회고했다. 결국 병세가 악화된 최 여사는 외국인 선교회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 조계지를 나갈 수 없었던 백범은 부인의 임종도 보지 못했다.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갔으나 최 여사는 이미 영안실로 옮겨진 뒤였다.

임시정부 요인들뿐 아니라 당시 고국을 떠나 중국으로 시베리아로 떠돌던 독립투사들은 누구나 피를 토하는 사연들을 갖고 있다. 그들은 굶주리고 도피하고 체포돼 고문을 받으면서도 조국 독립만을 꿈꿨다. 그들의 독립 투쟁이 없었더라도 일본은 패망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싸우지 않았다면 한반도 역사는 잊히고 지금 우리의 대한민국도 없었을지 모른다.

베이징=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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