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곡은 시대다] 대중음악, 드디어 클래식과 만나다


 
가수 이동원(오른쪽)과 성악가 박인수가 1989년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향수’를 열창하고 있다. 당시 가요계를 뒤흔든 이 곡은 대중음악과 클래식 사이에 놓인 벽을 허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튜브 캡처





예술사는 거대한 만남의 역사다. 예술은 종교와 만나고 정치와 만나며 과학 기술과 만난다. 다른 분야의 예술과도 만나고, 같은 갈래 안의 장르끼리도 만나곤 한다. 그 만남 자체는 기존 전통과 질서의 전복일 때가 있는가 하면, 오랜 편견과 질시를 극복하는 것일 때도 있다.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하나의 독립적인 예술로 인정받기 시작했던 대중음악은 그 탄생지인 서구에서조차 독창성이 결여됐다는 지적을 받았다. 생명주기가 극히 짧은 유행 상품 같은 성격의 하급문화로 간주됐다. 그러나 라디오와 TV라는 전파 매체의 강력한 성장과 더불어 대중음악은 영화와 함께 20세기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예술로 성장했다.

대중음악가와 성악가와 시인의 만남

인류의 기나긴 예술사에서 이토록 짧은 기간에 전 지구적 범위로 확장한 예술 장르는 아마도 전례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교회와 왕실, 그리고 귀족들의 후원에 의해 권력을 누려왔던 클래식 예술가들은 대중음악의 ‘천박한’ 예술적 품격을 문제삼았다. 경쟁자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이들에게 팝 음악은 저소득층에 어필하는 ‘수준 낮은’ 문화였다.

그러나 대중음악의 압도적인 ‘양’은 음악계를 지배하게 된다. 1950년대의 로큰롤 혁명이 전 세계 젊은이들 가슴에 불을 지르며 급격히 성장하자 클래식 진영은 자신들이 마침내 소수자로 전락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클래식의 상징적 인물인 뉴욕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은 “앞으로 50년 뒤의 음악사는 60년대가 비틀스의 시대라고 쓰게 될 것”이라며 패배를 인정했다.

팝이 이토록 맹렬한 속도로 전진할 수 있었던 동력을 단순히 음반시장의 논리로만 설명할 순 없을 것이다. 여기엔 대중음악 자체가 지닌 유연하고 개방적이며 진입 장벽이 낮은 양식적 특성이 개입하고 있다. 즉, 클래식처럼 절대적이며 권위적인 미학적 억압이 팝엔 없었다.

대중음악은 재즈와도 만났고 클래식의 요소도 아무런 무리 없이 받아들였다. 세계 각국의 민속음악 전통과도 편견 없이 만나면서 자신의 경계를 확장시켰다. ‘크로스오버(crossover)’라고 불러도 좋고, ‘퓨전(fusion)’이라고 불러도 상관없으며, ‘컬래버레이션(collaboration)’이라 일러도 무방할 것이다. 이와 같은 광폭 행보가 짧은 시간 안에 양적 확장과 질적 심화를 순식간에 가져왔으며, 대중음악은 인류가 가장 사랑하는 일상 문화로 자리잡게 됐다.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88년, 굉장히 의미심장한 음악적 만남 하나가 늦은 가을에 성사됐다. 시적인 아우라가 충만한 포크 뮤지션 이동원이 서울대 음대 성악과 교수인 테너 박인수와 음악적으로 조우한 것이다. 이 역사적인 만남을 매개한 작곡가는 한국 대중음악의 베테랑 뮤지션 김희갑이었으며, 식민지 시대의 위대한 시인 정지용이었다.

시에 관심 없는 포크 뮤지션은 아마도 없겠지만 이동원은 이 걸작을 부르기 전에도 정호승과 천상병, 장석주 같은 시인의 텍스트를 즐겨 채택했었다. 그가 84년 발표한 ‘이별 노래’는 정호승의 시에 최종혁이 곡을 붙인 것으로 그의 활동 초창기를 대표한 작품이었다.

시를 사랑한 이동원은 정지용의 ‘향수’를 특히 애송했고, 이 시를 노래로 만들어 줄 작곡가를 찾다가 김희갑을 만났다. 재즈와 로큰롤, 그리고 트로트와 발라드까지 광범한 소화력을 가진 김희갑이었지만 처음엔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노래가 되기엔 산문적 표현이 너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동원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열정에 마음이 움직인 대가는 이 시가 가진 거대한 매력에 도전한다. 그러나 이 한 편의 시가 노래가 되는 데엔 무려 10개월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대중음악의 다양한 장르를 지배하고 뮤지컬까지 아울렀던 김희갑의 내공이 한 편의 시에 집중됐다.

‘향수’ 탄생의 숨은 스토리

이 시, 혹은 이 노래엔 또 하나의 역사적인 만남이 숨어 있다. 바로 남과 북이다. 충남 옥천 출신인 정지용은 한국전쟁 당시 월북 작가로 분류돼 오랫동안 휴전선의 남쪽에서는 공식적으로 호명할 수 없는 이름이었다. 해방 직후 잠시 좌익계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아동문학 분과장을 맡은 적이 있지만 그는 생래적으로 좌익과는 맞지 않았고 그의 시에도 이념적인 요소는 거의 찾기 어렵다. 평안도 출신의 동갑내기 시인 김소월처럼 20대의 그는 한국어의 서정을 가장 아름답게 그려낸 시어를 구사했으며, 30대에 이르러서는 모더니즘 계열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발돋움했다.

정지용은 전쟁이 발발한 후 피난을 가지 못하는 바람에 인민군에 의해 수감됐고, 인민군의 퇴각과 함께 북쪽으로 끌려갔다. 하지만 해방 직후의 짧은 좌익 가담 경력은 그를 영구히 ‘월북작가’로 구금해 버리게 된다. 북한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납북 도중 소요산 어귀에서 미 공군의 공습으로 사망했다는 설이 있고, 평양 감옥에서 폭사했다는 말도 있는데 어느 것이나 확실하진 않지만 전쟁 중에 사망한 게 거의 명백해 보인다.

이런 우여곡절 탓에 그의 이름은 대한민국에선 전쟁 이후 35년 동안 어둠 속에 봉인돼 있어야 했다. 특히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 정권 하에서 그의 복권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88년 올림픽이 가져온 해빙 무드가 상황을 바꾼다. 남북 간 문화 교류가 정부 차원에서 이뤄졌고, 이 교류의 일환으로 월북작가 작품에 대한 해금 조치가 단행된 것이다. 이 해금 과정에서 정지용은 ‘월북’이 아닌 ‘납북’ 판정을 받았다. 그렇게 그의 시는 우리 품으로 돌아왔고, 한 가수의 시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노래로 거듭났다.

이미 2000곡 이상의 작품을 발표한 김희갑이었지만 이 노래의 완성도는 그의 전 작품에서 가장 독보적이다. 노래로 만들기 어려운 대목조차 그는 원작의 어구 하나를 수정하지 않았다. 시 원문의 뉘앙스를 음악적으로 완벽하게 되살려 놓았다. 이동원은 이 악보를 들고 테너 박인수에게 달려갔다. 악보를 본 박인수는 대중음악과 클래식 진영 간의 깊은 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두 남자의 목소리가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는 하모니를 이루게 된 것이다.

기적적으로 탄생한 이 노래가 대중의 경의에 찬 환호를 받게 된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한국 대중음악은 한 발짝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물론 박인수는 ‘상업적인 활동’이 문제시돼 국립오페라단을 그만두게 되었지만 말이다.

이 노래를 두고 컨트리 가수 존 덴버와 세계적인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가 듀오를 이룬 80년의 ‘퍼햅스 러브(Perhaps Love)’를 벤치마킹한 노래로 치부해 버린다면 그것은 이 노래와 이 노래의 탄생에 기여한 이들을 모독하는 짓이다. 적어도 ‘향수’는 이 노래보다 더 높은 예술적 경지에 놓여 있다. 그리고 ‘퍼햅스 러브’가 양 진영 간 슈퍼스타들이 만나 만들어낸 이벤트에 가깝다면 ‘향수’의 컬래버레이션은 이벤트가 아닌, 미학적 필연의 결과라고 봐야 한다. 이 노래엔 어느 누구로 대체될 수 없는 딱 이 조합, 이 가창만의 간절함이 마디마디에 배어나온다.

하지만 이런 예술적 만남의 후속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동원만큼 노래의 원형인 시, 아니 어쩌면 시의 원형인 노래 사이의 간극을 메꿀 수 있는 대중음악가는 등장하지 않았다. 대중음악은 K팝이라는 브랜드를 달고 세계 시장으로 달려 나갔고 클래식은 의미 없는 유폐의 운명을 선택했다.

비틀스의 오랜 명곡 ‘예스터데이(Yesterday)’의 첫 반복 구간에선 폴 매카트니의 고독한 목소리 뒤로 모차르트풍의 현악4중주가 고요히 흘러나온다. 장르의 경계를 넘어선다는 것은 바로 장르의 성숙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양한 소리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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