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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수의 감성노트] 갈등을 푼다? 품고 간다!


 
김병수 정신과 전문의


어떻게 보면 무척 수동적이라고 평가받을 수도 있겠지만, 갈등은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좋은 대처법 중에 하나라고 나는 믿고 있다.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도 당연히 고려해야 할 방법인데, 현실에서는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부부 문제, 직장 상사와의 갈등, 연인과의 불화로 고통 받는 이들을 상담하면서 “갈등이란 푸는 것이 아니라 품고 가는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불안과 우울에 시달릴 정도의 갈등이라면 대체로 쉽게 해결책을 찾을 수 없거나, 답을 알아도 실천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풀릴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릇된 방법으로 풀려다가 더 꼬이기도 한다. 이럴 때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바로잡아지기를 기다리는 편이 낫다.

옳은 말로 타인을 변화시키려고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 언어와 논리로 타인을 장악하려는 욕심은 버리는 게 좋다. 설득하려고 목소리를 높이면 높일수록 내 생각은 타인의 마음에서 튕겨나간다. ‘언제나 나는 옳다’는 믿음으로 상대를 변화시키려고 하면 타인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고 방어 편향 (Defensive Bias)을 더 강화한다. 자기 신념에 동조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건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개인이 가진 뿌리 깊은 생각을 변화시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비록 그 생각이 잘못된 것처럼 보여도 발생 계통을 따라가면 나름의 이유와 합리성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것을 바꾸려고 덤벼든다면? 오히려 저항하며 자기 신념에 따른 행동을 더 많이 하게 된다. 심리적 역반응이 일어나고 불화는 커진다.

“갈등을 해소하고 마음을 하나로 모으자”는 구호는 듣기 좋아도 실현될 수는 없다. 사람마다 원하는 것이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고, 생활방식도 다 다른데 어떻게 생각이 하나로 딱 모아지겠는가. 갈등이 없다면 인간 세상은 마찰 없이 돌아가는 기계 시스템과 다를 바 없다. 삐걱거리고 어긋날 때도 있지만, 이런 불협화음을 통해 사회는 진화한다.

갈등은 해롭고 무조건 없애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오류다. 갈등은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탄의 원천이다. 우리는 갈등을 겪고서야 그동안 알지 못했던 사람과 세상의 이면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된다. 아무런 충돌이 없다면 좁디좁은 인식으로 타인을 한정하며 그 틀로만 세상을 보게 된다. 충돌이 생기고 감정이 요동치면 그제야 “어, 이게 뭐지” 하며 타인을 낯설게 인식하게 된다. 관계가 매끄럽게만 흐르면 새로운 관점과 인식은 필요하지 않고 타인을 더 깊이 이해하려는 욕심도 생기지 않는다. 성가시고 괴로워서 화도 나겠지만, 바로 그때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행동하지? 무슨 심리로 저런 말을 하는 거지?’라며 의문을 품게 되고, 이것이 인생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기업에서 강의할 때 “가족 같은 팀을 만들자”고 외치는 팀장이 있으면, 절대 그러지 말라고 한다. 겉으로야 팀원들이 서로 협력하는 분위기를 만들자는 취지에서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이겠지만 “우리는 서로 친하니 이 정도는 참고 견뎌라”라고 하는 통제 욕구 역시 이 말속에 담겨 있다. 이럴 때 ‘가족’은 그런 통제를 정당화하는 구호로 작용한다. 팀원이 서로 반목하지 않고 친하게 지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경계를 지켜주는 것이 먼저다. 누군가에게는 야근해서 고과를 잘 받는 것보다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식사 시간이 더 소중할 수 있고, 퇴근 후에 동료들과 어울리며 친목을 다지는 것보다 ‘혼밥’을 할 수 있는 자유가 더 중요할 수도 있으니까.

타인에게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하지 않고, 내 기준으로 타인을 평가하지 않으며, 개인을 길들이고 통제하지 않으려는 사회라야 조금이나마 갈등이 줄어든다. 누구나 한계와 약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각자 나름대로 자기 삶에 만족하게 되면 사람은 저절로 부드러워진다. 타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나의 행동양식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각자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심리적 거리를 지켜주는 것. 팍팍한 현실에서도 타인에 대한 상냥함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가 지켜야 할 원칙은 이런 것이 아닐까.

김병수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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