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곡은 시대다] 젊은 거장의 사자후 ⑮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1980)


 
가수 조용필이 지난 5월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데뷔 50주년 기념공연에서 관객들의 환호에 두 팔을 들어 화답하고 있다. 조용필 50주년 추진위원회 제공
 
그의 히트곡 '창밖의 여자'가 실린 음반 재킷. 조용필 50주년 추진위원회 제공


대한민국 건국 이후 그토록 고요하게 혼란스러운 시절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1979년 늦가을부터 80년 5월의 봄까지. 영원히 군림할 것 같던 철권 독재자 박정희는 어이없이 최측근 오른팔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목숨을 잃었다. 무혈 쿠데타를 일으킨 김재규는 권력의 중심부로 진입한 하나회 신군부들이 주도한 군사법정에서 전격적으로 처형됐다.

당시의 대한민국 대중은 이 돌발적인 사태들의 근본적인 원인을 짚을 만한 정보를 공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과의 권력 암투로 일어난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사건은 80년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기 전, 부산 및 마산에서 일어난 부마항쟁의 무력적인 진압을 결심한 최고 통치자를 저지하려고 벌인 암살이었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김재규의 법정 진술을 토대로 볼 때 10·26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가 건설부장관으로 일하던 6∼7년 전부터 준비돼온 거사였던 것 같다. 김재규는 법정에서 스스로 한국의 브루투스임을 증명하려고 했다. 카이사르(박정희)를 사랑했지만 카이사르보다 로마(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더 사랑하는 것처럼 말했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오랫동안 탄압받아야 했던 야당과 청년 지식인 중심의 재야는 박정희의 죽음을 기리며 몇 달 동안 매체에서 울려 퍼지는 만가 ‘콜 니드라이’를 들으며 꿈을 꾸기 시작했다. 60년 4·19 이후 좌절된 민주화의 봄을 말이다. 그러나 그 꿈은 학생운동권의 서울역 회군, 광주를 피로 물들인 5·18과 함께 다시 좌절되고 만다. 이 잔인했던 봄에 하나의 노래가 대중의 가슴 한가운데에 처절하게 뿌리를 내렸으니 바로 ‘창밖의 여자’다.

가왕의 등장

이 노래를 만들고 부른 이는 놀랍게도 조용필이었다. 여기서 왜 ‘놀랍게도’라는 단어를 쓰느냐면 그는 3∼4년 전 ‘돌아와요 부산항에’라는, 히트는 했으나 음악적 상상력이 빈약한 구시대적인 노래만을 남기고 기억 너머 저편으로 사라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조용필은 77년 2차 대마초 파동에 휩쓸려 활동정지 처분을 받았다. 그 처분은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풀리지 않았다. 음악을 박탈당한 청년은 울분과 좌절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거장으로 거듭나는 독공을 거듭했다. 그리고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비상의 웅지를 펼쳐 보였다. 이 노래의 텍스트는 복잡하고도 강력했다. 아울러 그 퍼포먼스는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통속적으로 부르던 그 청년의 기억을 완전히 지워버릴 정도로 도도했다. 20년 전 인터뷰에서 이 노래에 대해 설명한 조용필의 얘기를 들어보자.

“80년 그때, 나 자신을 포함해 당시 대중들의 마음속엔 형언하지 못할 숱한 갈망들이 있었다. ‘창밖의 여자’와 ‘단발머리’는 모두 70년대의 막바지에 만든 곡이다. 앞의 노래가 과거와 기존의 세대의 갈망을 대변한다면 후자는 이제부터 시작될 미래와 다음 세대의 갈망을 담으려고 했다. ‘창밖의 여자’를 그래픽으로 보자. 이 노래에는 세 개의 산봉우리가 있다. 첫 번째 산을 넘을 때 이것이 정상인가 하면 내려가야 하고, 내려가면 험난한 산이 또 하나 등장한다. 이에 비하면 ‘단발머리’는 하나로 가는 음악이다. 그러나 나무가 무수히 많다. 나는 A-B-A로 반복하는 당시 우리 대중음악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한 테마에서 코드만 바뀌어 진행하는 그런 시도들에서 자유롭고 싶었다. 내가 첫 앨범으로 간주하는, 80년 출시한 앨범이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많은 사람들이 나와 똑같이 원하고 있었음을 절감할 수 있었다. 이제는 마음대로 만들고 뜻을 펼쳐도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가왕의 대관식은 한국 현대사의 가슴 아픈 상처 중의 하나가 만들어지는 시점에서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저 한 곡의 반짝 히트로 사라져 버린 것 같았던 더벅머리 청년이 뜻을 세운다는 서른의 나이에 거장으로 등극한 것이다. 조용필은 30년대나 40년대에 활동한 남인수와 이난영, 해방 직후부터 50년대 가요계를 빛낸 현인, 그리고 60년대 이미자에 이르는 한국 대중음악사 슈퍼스타 반열에서 극점을 장식하게 된다. 군웅이 활개 쳤던 80년대 가요계를 일인제국의 시대로 규정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가요의 위상을 끌어올리다

조용필이 가요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성공시키면서 시작된 히트곡들의 숫자에만 국한되진 않는다. 그는 자신의 곡을 스스로 장악한 최초의 슈퍼 뮤지션이었다. ‘위대한 탄생’이라는 슈퍼 밴드의 리더였다. 트로트에서 스탠더드 팝, 로큰롤, 댄스뮤직, 민요와 동요에 이르기까지 식민지 시대 이래 한국 대중음악의 문법을 총결산한 유일무이한 아티스트였다. 그가 있음으로써 8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황금기가 구축됐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공헌은 그를 통해 서구 대중음악이 장악하고 있던 음반 시장과 방송 매체의 주도권을 국내 대중음악이 가져왔다는 데 있다. 그는 30만장 시대를 열어젖혔으며, 2대 8 내지 3대 7 정도로 열세에 있던 한국 대중음악의 점유율을 정반대로 뒤집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포스트 서태지 세대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서구 음악에 대한 한국 대중음악의 우위는 결코 우연히 나타난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80년대 중·후반 일본 음악 시장에 진출해 세 장의 골드 레코드를 기록하는 기념비를 남겼다. 이런 업적은 21세기 세계 시장으로 진출하는 K팝의 시금석이 됐다. 그의 국내 공연에 일본인 팬들이 몰려오기 시작한 것도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조용필은 남인수와 이난영, 남진과 나훈아, 이미자로 이어 내려오던 주류 대중음악의 협소한 틀을 활짝 엶과 동시에 그 틀을 굳건하게 잡았다. 조용필의 등장은 김현식과 들국화로 대표되는 80년대 중반 언더그라운드 혁명과 함께 한국 대중음악의 지평을 넓힌 사건이었다. 빛이 강해야 그림자가 짙듯이 주류가 올바로 설 때에만 비주류도 풍부하게 존립할 수 있는데, 그는 주류와 비주류를 아우를 수 있는 진정한 음악 황제였다.

광주의 비극이 이 땅을 뒤덮을 때 득의만만하게 우리에게 제시한 ‘창밖의 여자’와 ‘단발머리’는 긴급조치의 암흑기 아래 또다시 통속의 동어반복으로 몰락해 가던 한국 대중음악을 기사회생시켰다. 아울러 ‘발라드 VS 댄스뮤직’이라는 80년대 이후의 지형도를 단번에 구축하는 이정표가 됐다. 조용필은 이 성공에 머무르지 않고 이후 발표한 음반들까지 성공시키면서 10대 취향과 성인 취향의 대중음악 질서를 동시에 좌우하게 된다.

진정 경이로운 것은 기존의 트로트와 서구 대중음악의 그 어떤 요소도 그의 손을 거치면 전혀 다른 뉘앙스로 탈바꿈했다는 데 있다. 이 연금술의 비결은 어쩌면 너무나 평범한 데에 있을 것이다. 그는 서구의 대중음악을 수용하는 그 순간에도 서구에 대한 환상의 우물에 자신을 빠트리지 않았다. 서구의 음계 위로 좌충우돌할 때에도 민요와 잡가의 본연적인 DNA를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겐 그의 음악을 완성할 수 있는 밴드가 필요했고, 그것에 모든 것을 걸었다. 환갑이 지나서도 여전한 그의 인기 비결은 밴드라는 음악 참호 속에서 배태된 내공 덕분이 아닐까? 이 대목에 대해 조용필은 이렇게 얘기한다.

“음악의 테크닉은 결코 악보로만 표현할 수 없다. 뮤지션의 감정과 감정이 부딪힐 때만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기만의 사운드를 가지고 가려면 밴드는 필연적이다. 신해철의 경우도 아마 밴드를 꾸리지 않으면 자신의 음악을 지탱해 나갈 수 없을 것이다. 나는 68년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부터 그룹의 기타리스트였고 만들어 온 곡들도 밴드의 음악이었다.”

신군부의 통치와 함께 컬러 방송의 시대가 열리고 대중음악의 주력 수용층이 10대로 이동하는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필은 ‘오빠부대’의 첫 번째 우상이 됐다. 그러나 단지 그것으로 그친다면 조용필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제국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며 천재의 결과물도 아니었다. 우리가 소망할 수 있는 대중음악가의 모든 미덕을 그는 갖추고 있었다. 대중음악의 핵심을 포착해내는 집요하면서도 자유자재인 작곡 능력, 정녕 ‘가객’이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카리스마 충만한 보컬, 새로운 테크닉과 효과에 대한 진지한 검토와 비판적 수용, 스타시스템이라는 복마전 속에서도 투철했던 자기 관리, 라이브 콘서트에 대한 정열, 그리고 무엇보다도 ‘위대한 탄생’이라는 밴드에 대한 지나칠 만큼의 집착과 투자…. 어떤 예외적인 개인보다는 시대가 위대하다지만 그런 개인이 시대를 열어젖히고 끌고 가는 순간도 있는 법이다. 조용필은 80년대 대한민국의 대중문화사가 낳은 바로 그러한 예외적인 개인이었다.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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