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에 추구하는 아날로그 감성... 시를 필사하는 사람들

온라인 시 필사 모임에 참가하는 이미란씨가 지난 16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사옥에서 김용택의 시 ‘어느 날’을 종이에 옮겨 써 보이고 있다. 서영희 기자


회사원 이미란(40)씨는 요즘 시(詩)를 필사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며칠 전엔 영화 ‘완벽한 타인’에서 배우 염정아가 외던 유시영의 ‘잠수’를 찾아 옮겨 적었다. ‘사랑 속에 얼굴을 담그고/ 누가 더 오래 버티나 시합을 했지/ 넌 그냥 져주고/ 다른 시합하러 갔고/ 난 너 나간 것도 모르고/ 아직도 그 속에 잠겨있지.’ 영화의 여운을 더 길게 느낄 수 있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있었던 지난 15일엔 수험생 자필 확인용으로 제시된 시구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로 시작되는 김남조의 ‘편지’를 옮겨 적었다. 이씨는 19일 “매일 시를 필사하는 온라인 모임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시작했다. 시를 필사하면서 때론 위로를, 때론 기쁨을 얻는다. 시상이 떠올라 시도 몇 편 썼다”고 말했다.

디지털 시대에 이렇게 시를 종이에 옮겨 쓰는 아날로그 감성을 좇는 이들이 눈에 띈다. 작가 김소라(41)씨는 ‘100일 시 필사’ 모임 운영자다. SNS에 모임 공지를 올리고 참가자를 모집해 100일 동안 운영한다. 참가 방식은 간단하다. 100일 동안 매일 자기 손으로 쓴 시를 사진으로 찍어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리면 된다.

참가자들은 주부, 교사, 상담사, 직장인 등으로 다양하다. 주로 문학과 글쓰기에 관심 많은 이들이다. 중국 등 외국에서도 참가한다. 태교를 위해 참가하는 임신부도 있다. 지인의 권유로 필사에 참가하게 된 윤모(44)씨는 “손으로 쓰면 시를 되뇌며 더 깊이 의미를 새기게 돼 좋다”고 했다.

김 작가가 처음 이런 모임을 꾸린 건 2011년이다. 그는 “원래 지인들과 오프라인에서 만나 모임을 시작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의 형태로 하게 됐다”고 소개했다. 회기마다 참가자를 20명 정도로 제한하고 100일 단위로 진행한다. 독서와 글쓰기를 습관으로 만들려면 매일 일정 시간 꾸준히 할 필요가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참가비가 없는 대신 필사를 하지 않은 날엔 벌금 1000원을 책정한다. 이렇게 모아진 벌금은 국제앰네스티 등 시민사회단체 등에 기부한다. 지금까지 200명 이상이 이 모임을 거쳐 갔다.

참가자 중에는 자기 거주지에서 다시 비슷한 형태의 모임을 꾸리는 경우도 제법 있다. 오프라인 모임을 하며 서로를 격려하기도 한다. 어떤 해 필사 모임은 출산을 앞둔 이를 위해 나머지 참가자들이 동화 ‘어린 왕자’ 전체를 필사해 깜짝 선물로 준 일도 있었다. 필사 모임에 참가하다가 글을 써서 책을 낸 경우도 있다. 최근 ‘육아가 유난히 고된 어느 날’(씽크스마트)을 낸 이소영(29)씨가 그렇다. 그는 “필사 모임에 참가하면서 육아의 고통을 이겨냈고, 힘겨움을 글로 표현할 수 있었다”고 했다. 사색의 문을 연 필사가 저자의 길까지 인도한 셈이다.

이런 시 필사 열기에는 관련 책도 한몫했다. 시인 김용택이 2015년에 낸 필사용으로 묶은 시 모음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예담)는 84쇄를 찍었고 지금도 매월 수백권씩 꾸준히 나가고 있다. 출판사 북스테이는 2016년부터 시인별로 필사할 수 있는 ‘필사의 즐거움’ 시리즈를 내고 있다.

‘필사 전도사’ 격인 김 작가는 “시 필사는 하나의 심상에 오래 머무르게 한다”며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가는 시대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오래 음미하도록 하는 필사에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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