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황시운] 갇힌 존재들



동물원을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다. 동물원이 있는 도시에서 학교에 다닐 땐 일주일이 멀다고 동물원에 갔다. 용돈이 부족했으므로 지출에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는데, 당시 내게 동물원 입장료는 언제나 가장 중요한 용처였다. 덕분에 한 달에 두어 번쯤은 동물원에서 꽤 긴 시간을 보내며 좋아하는 동물들을 실컷 볼 수 있었다. 물론 돈이 없을 때도 동물원에 갔다. 그런 날엔 동물원 입구까지 천천히 걸어 올라가 저물녘까지 근처 화단에 걸터앉은 채 넋을 놓고 있다가 돌아오곤 했다. 나는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웃고 떠드는 것보다 혼자서 동물원에 오래 머물며 기린이나 사자, 곰, 늑대 같은 동물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게 더 좋았다. 그 시절의 내가 동물원에 그토록 집착했던 이유야 희미해졌지만, 그즈음 숨을 거둔 마지막 토종 늑대의 모습만은 지금까지도 생생히 기억한다.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동물원 나들이에 나선 아이를 보았다. 생애 첫 사파리 투어에 나선 아이는 동물들을 가까이에서 보고 먹이도 주며 무척 즐거워했다. 하지만 나는 한 점의 그늘도 없이 어여쁜 아이의 웃음을 보며 이 세상의 모든 동물원은 사라져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했다.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며 즐거워하는 아이나 아이에게 먹이를 받아먹는 동물들, 양쪽 모두를 위해 그게 옳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밀림이나 초원, 혹은 바다를 자유롭게 누벼야 할 동물들을 서식지를 흉내 낸 우리에 가두는 건 너무 가혹하다. 그로 인해 상동증(특정 행위를 장시간 반복 지속하는 이상 증세)을 보이는 동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 존재 자체에 환멸이 느껴질 지경이다. 아무리 동물원 환경을 개선한다고 한들, 그곳이 진짜 밀림이나 초원이 될 수는 없다. 물론 어느 한 시절의 나처럼 누군가는 동물원의 동물들에게서 특별한 위안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물들이 오직 인간을 위안하려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보면, 그것이 동물들에게 가짜 세상을 살아가게 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세상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고 인간에겐 동물을 가둘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황시운(소설가)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