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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대 위에서 바라본 세상의 진풍경 담아

요즘 사법부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사법부가 과거 정권에서 벌인 갖가지 재판 거래 의혹이 잇달아 불거졌기 때문이다. 판사 출신인 정재민씨는 이렇게 적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권력과 사법부 사이에 도저히 거래라는 것이 성립할 수 없도록 스스로 그 가교를 완전히 불태우고 이를 국민 앞에 인정받으면, 그때부터 사법부에 대한 진정한 신뢰가 싹트기 시작할 것이다.” 창비 제공




인공지능(AI)이 인간을 대신해 판사의 역할까지 떠맡는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AI는 인간보다 더 공정한 잣대로 정확한 판결을 내리게 될까.

엉뚱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황당한 전망이라고 무작정 깎아내릴 순 없을 것이다. 지금은 AI가 음악을 만들고 소설을 쓰고 바둑 챔피언까지 꺾는 시대다. 어쩌면 인간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판사 역할을 수행할지도 모른다. AI는 사건 기록을 검토할 때 놓치기 쉬운 부분까지 면밀하게 체크할 것이고 수학적으로 명확하게 유죄 여부를 판가름할 테니까.

자, 그렇다면 AI에 판사 역할을 맡겨도 괜찮을까. 판사 출신인 이 책의 저자는 “AI가 인간의 감정, 불완전성, 무의식, 직관을 제대로 이해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면서 “(정확한 판결은) 한 인간으로서 상식과 직감과 감정과 경험이 모두 풍부하게 형성되어 사리분별이 정확해져야 가능한 일”이라고 적었다. 그는 왜 이런 결론을 내놓았을까.

판사의 삶

책에 등장하는 내용을 조금만 더 소개하도록 하자. 저자가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절차라고 여기는 건 인정신문이다. 인정신문은 판사가 피고인을 상대로 이름 나이 직업 주소 등을 묻는 걸 가리키는데, 재판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인정신문을 중요하게 여기는 건 이때가 판사와 피고인이 처음 대면하는 순간이어서다. “나는 사람의 영혼은 눈빛과 목소리와 체온을 통해서 육체 밖으로 삐져나온다고 믿는다. 나는 재판의 핵심이 이런 만남에 있다고 생각한다. …공식적으로는 사건이 내게 배당된 순간 내가 그 피고인의 판사가 되겠지만, 내 마음속으로는 서로 직접 만났을 때 비로소 내가 그의 판사가 되고 그가 나의 피고인이 된다고 믿는 것이다.”

이쯤 되면 AI가 인간을 대신하기 힘든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는 사근사근한 어조로 판사의 삶을 들려주는 책이다. 저자는 16년간 판사로 일하다가 지난해 법복을 벗은 정재민(41)씨. 언젠가부터 서점가엔 검사 변호사 판사 출신 저자들이 펴낸 책이 인기를 끌고 있는데, ‘지금부터…’는 그 어떤 ‘법조인 에세이’와 견줘도 부족함이 없는 수작이다. 법대 위에서 바라본 세상의 진풍경이 한가득 담겨 있다.

책은 얼개부터 독특하다. 형사재판 과정에 맞춰 이야기가 전개된다. 판사가 사건 기록을 검토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재판이 시작되고 진행되는 장면을 들려주고, 판결문을 쓰고 선고를 내리는 과정을 그려낸다. 저자는 이런 형태의 뼈대를 세운 뒤 판사 생활을 하면서 겪은 기상천외한 사건들을, 판사로 일하며 느낀 보람과 회한의 감정들을 하나씩 보탠다.

형사재판을 소재로 삼은 건 “그것이 가장 중요한 재판”이라고 판단해서다. 책에 담긴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다른 재판은 ‘사건’을 재판하지만 형사재판은 ‘사람’을 심판한다. 형사법정은 사법부 소속 판사가, 입법부의 명령인 법률을 통해, 행정부를 대표해 형벌권을 행사하는 검사를 상대하는 자리다. 삼권분립의 가치가 뚜렷이 드러나는 공간인 셈이다.

사실 일반 독자들 입장에선 판사의 일상을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법조인만 하더라도 판사보다는 검사나 변호사인 경우가 많다. 추측건대 그 이유는 판사의 삶이 검사나 변호사의 그것에 비해 다이내믹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이 책이 선사하는 첫 번째 재미는 사람들이 실감하지 못하는 판사의 삶을 구체적으로 들려준다는 데 있다. 슬리퍼를 신고, 손가락에 골무를 끼고, 방대한 분량의 기록을 살피는 판사의 일상은 사무직 노동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다음과 같은 내용은 이 책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데, 판사도 평범한 인간일 뿐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되새기게 만든다.

“때로 나는 법정에서 산타클로스 판사가 되고 싶기도 하다. 산타 검사가 착한 일을 한 사람을 기소하면, 내가 빨간 모자를 쓰고 빨간 법복을 입고 피고인석에 앉은 착한 사람을 재판하는 것이다. 피고인의 선행이 해도 해도 너무 훌륭해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피고인을 사정없이 루돌프 사슴 썰매에 태워 몰디브에 6개월 보내는 형을 선고하는 것이다.”

“우린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

가독성을 크게 배가시키는 대목은 법정에서 들었던, 혹은 기록을 통해 확인했던 피고인들의 기상천외한 범죄 행각이다. 인정신문을 하는 단계부터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예컨대 저자는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라고 뻐기면서 사기 행각을 벌인 남성을 재판한 적이 있었다. 물론 이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피고인에게 친선대사라는 게 무슨 일을 하는 건지 궁금해 물었을 때 돌아온 답변은 이랬다고 한다.

“아, 그 (할리우드 여배우) 안젤리나 졸리가 하던 것 있지 않습니까? 미국은 졸리가 하는데 한국에서는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피고인은 유장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영국 옥스퍼드대를 나왔다” “국정원 비밀업무를 맡고 있다” “‘코드원’(대통령을 의미한다고 한다)이 자신에게 600억원을 지원키로 했다”…. 저자는 그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이 사기범 외에도 저자가 마주했던 희한한 피고인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인간 세상의 천태만상을 체감했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판사로 일하면서 느낀 건 무엇일까. 그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썼던 글을 소개하는 것으로 답변을 갈음한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다.”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에세이지만 행간과 자간에는 묵직하게 독자의 가슴을 짓누르거나, 한국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건드리는 부분이 곳곳에 등장한다. 영장주의, 불구속수사 원칙, 수사권 조정, 증거재판주의 같은 용어의 뜻이나 연원도 두루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지난해 판사를 그만뒀다. 책상물림에 백면서생일 수밖에 없는 판사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그는 “허공에 머물며 멀찍이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새의 삶이 아니라 온몸으로 대지를 뒹구는 뱀의 삶을 한 토막이라도 살아보고 싶었다”고 적었다.

현재 그는 방위사업청에서 원가검증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판사의 자리에서 내려온 걸 후회하진 않을까.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후회는 없다”며 웃었다. “축구로 따지자면 판사는 감독 같은 거죠. 어떤 일이 벌어진 뒤 뭐가 잘못됐는지 따지는 일을 하니까요. 감독이 아닌 선수로 살아보고 싶더군요. 지금 하는 일은 어렵지만 재밌어요(웃음).”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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