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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바윗길 지나 시인이 된다

강원도 설악산 노적봉 ‘한 편의 시를 위한 길’을 오르다 뒤돌아보면 장쾌한 풍광이 펼쳐진다. 가운데 하얀 바위인 피너클 지대와 멀리 웅장한 울산바위가 울긋불긋 가을 단풍과 함께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왼쪽 권금성으로 이어지는 절벽도 가을의 절정을 불태우고 있다.
 
‘한 편의 시를 위한 길’ 일곱 번째 피치를 오르는 등반객.
 
소토왕골을 아름답게 색칠한 단풍과 맑게 흐르는 계곡물.




강원도 설악산은 사계절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우리나라의 대표 명산이다. 사시사철 아름다운 산이지만, 가을날 오색찬란한 단풍이 물들면 그 어느 때보다도 화려한 경치를 선사한다. 한 폭의 수채화라는 표현으로 모자랄 지경이다.

설악산은 많은 등반 루트를 포함하고 있다. 이 가운데 노적봉(해발 716m)의 ‘한 편의 시를 위한 길’은 난이도로 치면 초급코스다. 암벽등반 입문자에 어울릴만한 리지(ridge·암릉)길로, 가장 인기 있는 암벽 루트 중 하나다.

때를 맞추기 위해 기다려왔던 바윗길이다. 언제 다가가도 멋진 풍광을 내놓지만 절정의 시기에 만나고 싶었다. ‘한 편의 시를 위한 길’은 아름다운 이름으로도 유명하다. 낭만적인 이름을 붙인 사람은 이 길을 개척한 경원대 국문과 출신의 시인이자 산악인 김기섭씨. 그가 이 바윗길을 개척하게 된 동기와 과정은 이렇다.

1982년 여름 그는 암벽등반을 마치고 동기와 함께 설악동-안락암-화채봉-대청봉-서북릉 종주 산행을 할 때 안락암 부근에서 노적봉을 바라봤다. 삼각형 모양의 노적봉이 피라미드처럼 멋있게 생긴 데다, 그 아래 피너클(pinnacle·뾰족한 바위) 지대를 지나 완만하게 아래로 길게 이어져 내려간 것을 보고 언젠가 등반해야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7년 뒤 경원대 산악부 대원들과 함께 개척 등반을 한 뒤 노적봉 정상에 섰다. 장엄한 토왕성폭포와 토왕골 선녀봉을 중심으로 좌우측 봉우리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마치 한 편의 장엄한 서사시를 보는 느낌이 들어 ‘한 편의 시를 위한 길’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됐다. 이후 선녀봉에 ‘별을 따는 소년들’ 등의 루트를 개척했다. 그는 모두 15개의 바윗길과 암릉길을 새로 냈다. 설악산 석황사골 ‘몽유도원도’, 도봉산 자운봉 ‘배추흰나비의 추억’ 등 대부분 서정적인 이름을 지어줬다.

‘한 편의 시를 위한 길’은 일반적으로 8∼10피치(pitch·구간)로 나눌 수 있다. 가운데 피너클 지대를 중심으로 하단부와 상단부로 나눈다. 최고난도가 5.8(9피치) 정도다.

첫 번째 피치는 약 20m. 난이도는 5.6이다. 가파르지 않은 바위를 약 15m 올라 오른쪽으로 꺾어져 올라간다. 경사가 별로 없어 여유롭게 주변 경치를 감상하기에 좋다. 오를수록 설악의 경치가 시시각각 새롭게 펼쳐진다.

두 번째 피치도 비슷한 수준. 이곳에서 소토왕골이 내려다보인다. 전날 내린 비 덕분에 소토왕골 상단부 소토왕폭에 물줄기가 제법 굵다. 여기까지는 특별한 등반기술이 없어도 안전장비를 착용하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50m로 다소 긴 세 번째 피치를 오르고 나면 긴장감을 주는 칼날 능선이 나타난다. 네 번째 피치의 시작이다. 높이가 약 20m 되는 칼날 능선은 홀드(손으로 잡거나 발로 디딜 수 있는 곳)가 좋아 큰 어려움은 없다. 다만 좌우로 내려다보이는 고도감 때문에 마음이 졸여진다. 등반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확 다가온다.

약 20m의 평이한 5피치를 지나면 바로 여섯 번째 피치인 피너클 지대가 나타난다. ‘한 편의 시를 위한 길’의 하이라이트 구간이다. 김기섭 시인은 이 구간을 이렇게 읊었다. ‘피너클 아래 까마득한/소토왕골의/시퍼런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다/우리가 가는 이 길은/동해 푸른 바다가 생기고/바람이 생기고/우리가 처음인지도 모른다.’

피너클 지대를 통과하면서 내려다보니 발아래로 까마득한 소토왕골이 아찔하다. 바닥까지의 높이가 약 150m라고 한다. 아찔함에 ‘심장이 쫄깃’해진다. 피너클 지대를 지나는 모습은 환상적이다. 앞에서 뒤로 또는 뒤에서 앞으로 어떤 장면을 담아도 한 폭의 그림 같다.

피너클 지대를 지나면 약 18m의 작은 암봉이 일곱 번째 피치다. 암벽을 넘으면 도보 구간이 연결된다. 약 35m의 여덟 번째 피치를 등반하고 나면 난도가 가장 높은 아홉 번째 피치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뒤돌아보는 풍광이 압권이다. 오른쪽으로는 소공원 주차장 뒤쪽에 달마봉이 하얀 모습으로 솟아 있고 가운데 멀리 울산바위가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왼쪽 권금성(700m)으로 올라가는 능선은 울긋불긋 단풍으로 가을의 절정을 알리고 있다. 권금성으로 부지런히 여행객을 실어 나르는 케이블카는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듯하다. 멀리 소공원을 오가는 사람들은 개미처럼 작게 보인다.

풍경 감상도 잠시. 다시 긴장 모드다. 아홉 번째 피치에 얕보아서는 안 될 수직의 크랙(바위 틈새)이 기다린다. 마지막 열 번째 피치 직벽에서도 홀드를 잘 찾아 오른다. 마지막 크랙을 돌파해 자일(로프) 없이 걸어 오르면 노적봉 정상이다.

이곳에서 장엄한 토왕성폭포를 가까이 볼 수 있다. 하늘에서 떨어질 듯 까마득한 직벽에서 320m 삼단 물줄기가 선녀의 비단옷처럼 늘어져 있다. 폭포는 뒤편 화채봉에서 발원해 칠성봉을 끼고 돌아 흘러내리는데 뒤편 봉우리들이 능선에 가리기 때문에 (산정에서) 갑자기 물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쏟아붓는 폭포수가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설악이 감추고 있는 비경 중의 비경이다.

이제 하산이 남았다. 교묘히 이어진 바위 사이로 겨우 한 사람 지나갈 만한 길을 지나면 한참을 이어지는 클라이밍다운 구간. 줄을 잡고 매달려 겨우 내려서야 하는 곳도 있다. 이후 로프 하강을 몇 차례 한 뒤 급경사의 너덜지대를 내려서면 소토왕골에 닿는다. 하산길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 또 낙석이 생기기 쉽기 때문에 주의가 요구된다. 등반을 하고 나면 시인이 되는 ‘한 편의 시를 위한 길’. 설악의 품에서 생애 최고의 가을을 누렸다.

여행메모

비룡폭포 방향 계곡 옆 ‘출입구’ 안전장비 갖추고 허가 받아야


수도권에서 간다면 서울양양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양양에서 속초 방면으로 동해고속도로를 이용한 뒤 북양양나들목에서 빠진다. 대조평교차로에서 설악 방면으로 좌회전하고 도문교 직전에서 다시 좌회전해 직진하면 설악산소공원 주차장에 닿는다. 주차료 5000원, 문화재 관람료 3500원을 각각 내야 한다.

이곳에서 도보로 설악산 소공원으로 들어가 비룡교를 건너 비룡폭포 탐방로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150m가량 내려가면 조그만 계곡 옆에 ‘암장이용안내’ ‘탐방로 아님’ 표지판이 보인다. 이곳이 입구다. 다만 국립공원관리공단에 미리 암벽등반 신청을 한 뒤 허가를 받아야 들어갈 수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흐릿하지만 길이 보인다. 길을 따라 가다 소토왕골 하천을 건너면 바로 ‘한편의 시를 위한 길’의 출발점이 나온다.

설악산(속초)=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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