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곡은 시대다] 제4공화국 정점에 처형돼 아름답고도 슬픈 한국 록 ⑫ 신중현과 엽전들의


 
젊은 시절 뮤지션 신중현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앞줄 가운데에 서서 기타를 치고 있는 사람이 신중현이다. 1938년 서울에서 태어나 60년대부터 꾸준히 음악 활동을 해오고 있는 그는 ‘한국 록의 대부’로 통한다. 2009년 세계적인 기타 브랜드인 펜더는 아시아 뮤지션으로는 최초로 신중현에게 기타를 헌정하기도 했다. 국민일보DB


1972년 11월 박정희는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선거에 의해 임기 6년의 대통령직에 다시 올랐다. 78년에도 다시 대통령이 될 것이고, 그가 살아 있는 한은 영원히 대통령이 될 것이니 이미 72년부터 그는 사실상 무소불위의 황제나 다름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어릴 적에 감동적으로 읽었다는 나폴레옹 전기 속 나폴레옹처럼 그는 스스로 종신집권의 제관식을 마련해 왕관을 썼다. 한국의 미약한 민주주의는 그렇게 심장의 박동이 멈췄다.

박정희가 만든 ‘국민가요’의 등장

직전 해인 71년 초여름에 나온 김민기의 ‘아침이슬’은 이제 시대의 만가(輓歌)가 됐다. 그 ‘아침이슬’이 발표된 지 꼭 1년 뒤인 72년 6월, 유신의 분위기가 슬슬 조성되기 시작하던 바로 그때, 70년대를 지배하게 될 노래가 7인치 LP에 담겨 슬그머니 나온다. 바로 ‘새마을 노래’다. 선명회 합창단이 부른 이 음반의 재킷엔 무슨 연유인지 오케스트라 지휘자이자 작곡가인 홍연택이 작곡자로 인쇄돼 있지만 이 노래를 만든 박정희가 청와대로 음악인을 초청해 홍연택에게 오케스트라 반주를 맡겼다는 설이 유력하다.

제4공화국 시대 대한민국을 지배한 최고의 음악가는 단연 박정희였다. 그는 ‘새마을 노래’와 후속탄 ‘나의 조국’을 작곡했으며, 클래식과 대중음악 가리지 않고 전 분야의 작곡가들을 동원해 수많은 ‘국민가요’의 아바타들을 기획해 전국적으로 보급했다.

‘명랑’하고 ‘건전’한 국민가요 개창운동은 정치가로서 그가 삼았던 생애의 과업이었다.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국가 재건을 선포할 때부터 박정희는 ‘새 나라는 부른다’ 등의 국민가요 작곡을 공모하면서 500만환을 내걸었지만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앞세운 대중음악의 위세에 힘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무릎을 꿇었었다.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하는 ‘위로부터의 혁명’을 지휘했던 자신만만한 군인의 작은 패배였다. 한·일 회담 이후에도 왜색가요를 일소하겠다는 정풍운동을 고안했지만 대중의 취향은 이번에도 그를 외면했다. 오히려 70년 문화공보부가 제정한 국민가요 중 7곡은 일본 군가를 모방했거나 왜색 조 노래라고 일선 음악교사들이 비판하는 역공까지 맞기도 했다.

그러나 미증유의 권력을 장악한 72년부터 상황은 달라진다. 그 전환의 모멘텀은 바로 ‘새마을 노래’였다. 문공부는 ‘온 국민 밝은 노래 부르기 운동’을 전개하면서 이미 장악한 대중매체들을 통해 공격적으로 노래를 보급하고 선전했다. 그러면서 지역 및 전국 단위의 합창대회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74년 ‘국민 노래 부르기 총본부’를 결성했고, 국민 대합창운동을 전개했다. 학교나 직장이나 단체에 합창단이 2000개 이상 생겨났다. 일제강점기에 내선일체와 국가총동원체제의 깃발 아래서 자행된 노래에 대한 국가주의적 통제가 유신의 이름으로 새롭게 다시 태어난 것이다.

‘대통령 각하’가 직접 지은 두 노래를 필두로 수많은 노래들이 만들어졌고, 졸지에 어용 음악인이 된 많은 작사가와 작곡가가 그 일을 떠맡았다. 가곡 ‘가고파’의 작곡가인 김동진은 시인 양병문과 합작해 ‘조국찬가’를 발표했다. 극작가 한운사는 창작 국악계의 대표 작곡가 김희조와 국민가요의 걸작 ‘잘 살아보세’를 만들었다. 이은상 작사, 현제명 작곡의 ‘대한의 노래’도 다시 태어났다. 현제명의 뒤를 이어 서울음대 학장이 되었던 ‘동심초’의 작곡가 김성태는 ‘민방위의 노래’로 힘을 보탰다. ‘노란 샤쓰의 사나이’의 작곡가인 손석우도 ‘우리 마을’이라는 노래를 만들었고, 김영서 작곡의 ‘새마을 아가씨’와 전석환의 ‘좋아졌네’도 이 같은 맥락 위에 놓인 노래라고 할 수 있겠다.

깜짝 등장한 ‘미인’, 3000만의 애창곡이 되다

한반도 남쪽의 모든 관공서와 학교, 공장, 유원지까지 이 노래들은 파상적으로 울려 퍼졌고, 노래를 통한 ‘국민총화(國民總和)’의 태평성대가 눈앞에 다가온 듯했다. 그러나 74년 가을, 30대 중반을 넘어서던 늙은 장발 청년 3인조가 만든 3분 1초짜리 노래 하나가 또 다른 의미의 국민총화를 이루며 박정희 주도의 국민개창운동에 균열을 일으키게 된다. 3인조 록밴드 엽전들에 의한 ‘미인’이다.

74년 국내외 정세는 점점 박정희 유신 정권에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전해인 73년 10월엔 이집트와 시리아 연합군이 이스라엘의 점령 지역을 기습했다. 라마단 전쟁, 혹은 욤 키프르 전쟁이라고 불리게 된 제4차 중동전이 일어난 것이다. 유가는 급속히 치솟았다. 중화학공업 육성에 올인하던 박정희 정권엔 최악의 악재였다. 권력 유지의 유일한 정당성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유신헌법의 반민주성에 항거하는 움직임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74년 1월 벽두 박정희정부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긴급조치 카드를 꺼내고 만 것이다. 3개월 만에 1호부터 4호까지 발효된 긴급조치는 한마디로 반유신운동 탄압에 집중된 것으로, 1호에 의거해 장준하와 백기완에게 15년 형을 언도하고, 민청학련의 비극을 분만한 4호로 인해 이철과 김지하 등 9명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으며 21명이 무기징역에 처해졌다. 사건 관련자 140명 형량의 총합이 무려 1650년에 이르는 이성을 상실한 폭거였다.

국내외 정세가 혼돈의 극점을 향해가는 그해 가을, 록밴드의 포맷으로는 단 한 번도 시장의 성공을 거둔 적이 없었던 불운한 로커 신중현에 의한 ‘미인’은 전설적인 성공을 거두며 단숨에 ‘3000만의 애창곡’이라는 영예를 획득한다.

아직도 많은 사람의 뇌리에 선연하게 남아 있는, 5음계를 미끄러져 내려가는 리프(반복적으로 제시되는 주제 선율)를 앞세우고 미취학아동부터 노년층까지 록 음악의 흥겨운 그루브로 초대했던 ‘미인’은 단연 한국 대중음악 사상 최고의 록 음악 성공작이다. 이 지점은 2년 전 더맨이라는 밴드로 발표해 전설적인 명곡으로 인정받았으나 시장의 성공과는 멀었던 ‘아름다운 강산’의 아픔을 보상받는 순간이기도 했다. 아울러 마이너리티의 뒷골목을 전전해야 했던 한국 록 음악이 비로소 예술적 시민권을 획득하는 순간이었다.

‘엽전들’이라는 미묘하게 자조적인 그룹명은 많은 뉘앙스를 자아낸다. 이 한글 이름은 64년 에드훠 이후 신중현이 만들고 해체한 수많은 밴드들 중 처음으로 영어를 쓰지 않은 이름이다. 이 중의적인 밴드 이름에는 돈이면 모든 것이 다 된다는 천민적인 배금주의와 이에 지배당하는 한국사회 구성원을 향한 경멸과 조소가 담겨 있다.

‘미인’의 성공은 단지 록의 명예회복에 그치는 것만이 아니었다. 당시 LP의 재료는 석유 화학 부산물이었는데 유가의 상승은 이제 갓 걸음마를 떼고 있는 한국 음반 산업마저 얼어붙게 했다. 이 구조적인 불황을 단숨에 분쇄해 음반 산업에 열기를 불어넣는 활력소 구실을 했다는 점도 지적돼야 할 것이다.

한국 대중음악사는 영원히 신중현이라는 이름을 비켜갈 수 없다. 그는 일렉트릭 기타를 매고 나타난 한국 최초의 ‘아티스트’였다. 그에 의해 록이라는 서구 대중음악 언어가 이 땅의 목소리로 제련됐다. 그는 진정한 의미를 띠는 최초의 음악감독이자 프로듀서였고 작곡가이자 수많은 그룹의 리더였다. 60년대 중반부터 그의 권능에 의해 펄시스터즈와 김추자 김정미 박인수 장현 같은 숱한 보컬리스트가 이전과 다른 노래들을 제출할 수 있었다.

신중현 사단이라고 불린 이들에 의해 서구 대중음악의 언어가 이 땅에 자리 잡았다. 애상과 비탄의 정서로만 일관돼온, 식민지 시대 트로트 대중음악은 그 위세가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그는 단순히 서구의 록을 받아들이는 차원에서 머문 것이 아니라 록에 전통음악의 요소를 접목시키기 위해 집요한 실험을 계속했다. ‘미인’의 쉽고 간결한 프레이즈 아래에는 가야금의 농현을 연상시키는 일렉트릭 기타의 실험적인 연주와 금속 타악기 파트를 중점으로 사용해 장타령 조의 신명을 자아내는 드럼 플레이가 녹아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무공에 걸맞은 대접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했다. 천민적인 음반회사는 그의 음악적 영감을 착취했으며 그 자신도 모르는 음반이 수도 없이 만들어지곤 했다. 공헌에 걸맞은 대접은커녕 유신 정권은 결국 그를 시민으로서의 생존권까지 박탈함으로써 정치적으로 그를 매장시켰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건 유신의 권력자들이 신중현을 상대로 권력의 하녀가 되기를 강요했지만, 그가 정중한 거절의 의사를 보인 까닭이었다.

신중현은 반유신의 정치적 입장을 가졌다기보다는 예술가에 대한 권력의 무도함을 소극적으로 비판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75년 4월 최악의 긴급조치로 꼽히는 9호를 발령하고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을 판결 직후 사형에 처한 유신 정권은 이미 이성을 잃고 있었다. 자신들의 통치에 항명한 ‘딴따라’ 하나를 본보기로 삼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75년의 해가 저물던 12월 30일, 유신 정권은 이른바 ‘대마초 파동’을 일으켜 신중현을 위시한 청년문화 기수들의 모든 활동을 정지시킴으로써 악랄한 보복을 감행했다. 사태의 심상찮음을 깨달은 신중현은 허겁지겁 건전한 내용을 담은(‘아름다운 강산’도 건전 버전으로 수록한) 엽전들 2집을 그해 벽두에 발표했지만 이 가슴 아픈 청원은 이미 시효가 끝나 있었다. 막 비상하려던 그 극점의 순간에 신중현은 격추된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록은 유신 공화국의 정오에 처형됐다. 그와 함께 활동 정지를 받은 대중예술인들은 얼마 되지 않아 전부 활동 정지에서 풀려나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지만 신중현은 박정희가 궁정동의 안가에서 목숨을 잃는 그 순간까지 무려 4년간 유형자 신분으로 살아야 했다. 유신 정권의 지독한 보복이었다.

<음악평론가>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