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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로봇에게 내 일을 빼앗긴다면…

‘사피엔스’로 세계적 작가가 된 유발 하라리는 신작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인공지능 시대에는 인간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일자리의 개념을 바꿔야 한다”면서 “아이를 키우고 노인을 보살피는 것 등을 일로 인정하고 정부가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영사 제공




“인류는 지구에서 가장 치명적인 종(種)이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풀어낸 방대한 이야기 중 기억에 각인된 문장은 이것이었다. 우리는 돈과 국가 같은 무형의 가치를 창조하는 능력으로 지구를 지배하게 됐는데 그것을 아주 파괴적으로 사용했다. 다른 종의 수많은 동식물과 호모 속(屬)의 사촌까지 멸종시키며 문명을 일궜다.

그렇게 이 행성을 손에 넣은 인류에게 곧 닥쳐올 미래를 그는 다른 책 ‘호모 데우스’에서 그렸다. 생명공학으로 신체를 업그레이드하고 인공지능(AI)으로 지적 한계를 넓힌 슈퍼휴먼의 출현을 상상한다. 그가 ‘신이 된 인간(호모 데우스)’이라 명명한 이들은 그런 기술에 접근하지 못해 여전히 사피엔스인 나머지 인간을 같은 종으로 인정해줄까.

과거에 치명적이었던 인류는 미래에도 그럴 수 있다. 과거의 피해자는 다른 종이었지만 미래의 피해자는 같은 인간일지 모른다. 이렇게 요약될 두 전작을 토대로 하라리는 인류를 다룬 세 번째 책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을 냈다. 그럼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말한다. 그는 ‘사피엔스’를 펴낸 뒤 세계를 다니며 강연을 했다. 청중이 인공지능과 알고리즘에 지루해할 때 효과적인 처방은 일자리 얘기를 꺼내는 거였다. 내 일도 로봇이 빼앗아갈지 사람들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미군은 무인기 프레데터 한 대를 운용하기 위해 30명을 고용하고 그것이 수집해온 정보를 분석하는 데 80명을 동원한다. 신기술은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지만 요즘 그렇게 생기는 일자리는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하다. 1920년 농업 기계화로 해고된 농장 일꾼은 트랙터 공장에 취직했고 1980년 실직한 공장 노동자는 슈퍼마켓 점원이 될 수 있었다. 많은 훈련이 필요하지 않아 가능했는데, 2050년 로봇에게 밀려난 슈퍼마켓 점원은 드론 조종사나 정보 분석가가 될 수 있을까. 하라리는 ‘무용(無用) 계급’의 출현을 예상했다. 19세기 마차몰이꾼은 자동차가 등장하자 택시기사로 변신했지만 말은 교통시장에서 완전히 퇴출됐다. AI와 로봇의 무대가 될 고용시장에서 많은 사람이 그 말과 같은 운명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사람의 일자리는 지킬 수 없는 건가. 그는 일의 개념을 넓히는 방법을 제시했다. 부모가 아이를 키우고 이웃이 서로를 보살피고 시민이 공동체를 조직하는 등의 매우 가치 있는 일이 현재 ‘일’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그런 행동을 일로 인정하면 일이 부족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가 엄마에게 월급을 줄 순 없으니 그 일의 대가는 결국 정부가 지불해야 한다. 최근 핀란드 등지에서 실험하는 기본소득 제도를 그는 그런 모델로 봤다. 일자리가 아니라 인간을 보호한다는 사고의 전환이 인간의 일자리를 지켜줄 거라고 했다.

이 책은 이렇게 일, 자유, 종교, 전쟁 등 21가지 주제를 놓고 닥쳐올 미래를 상상하며 대처할 실마리를 제시한다. ‘문명’의 다음 장은 ‘민족주의’고, ‘이민’을 말한 뒤 ‘테러리즘’으로 넘어가는데 별개로 보이는 이야기들을 하나의 사슬로 줄줄이 엮어 놨다. 이런 식이다. 서구와 이슬람권의 갈등을 문명의 충돌이라 부르지만 사실 세계에는 하나의 문명이 있을 뿐이다. 가장 극단적인 이슬람국가(IS)도 이라크 북부를 점령했을 때 현지 은행에 있던 미국 달러를 불태우지 않았다. 달러로 돌아가는 세계 경제의 질서를 인정한 셈이다. 1000년 전에는 몸이 아플 때 어디에 사느냐가 대단히 중요했다. 중국에선 침을 맞았을 테고 아프리카에선 주술사를 만나야 했다. 지금은 어디에 있든 똑같은 과학이론을 배운 흰색 가운의 의사에게 비슷한 처방을 받는다.

지구문명이란 표현을 써야 할 만큼 동질화된 세계에서 최근 민족주의 물결이 거세졌다. 하라리는 인류를 위협하는 세 가지로 핵전쟁, 기후변화와 생태 붕괴, AI와 생명공학이 가져올 기술적 파괴를 꼽았다. 어느 것도 개별 국가 차원에선 대처할 수 없는데 지도자들은 더 이상 지구적 어젠다를 말하지 않는다. 트럼프의 미국과 시진핑의 중국, 분화되는 유럽과 현대판 차르의 러시아는 자국 우선주의를 외치고 있다. 인류가 사실상 하나의 문명임을 인식하고 함께 문제를 풀려면 경제의 세계화보다 정치의 지구화가 필요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사피엔스’는 800만부가 팔렸고 ‘호모 데우스’는 절반인 400만부를 기록했다. ‘…21가지 제언’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를 다뤄서인지 외신의 평가는 엇갈렸다. 하라리는 빅 히스토리 연구자답게 수백 년에 걸쳐 벌어진 일을 단 몇 줄로 정리하는 데 탁월하다. 이 책에도 그런 대목이 빼곡하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산업혁명은 세계를 설명하고 미래를 제시하는 세 가지 거대한 이야기,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낳았다. 2차 대전을 거치며 파시즘이 먼저 나가떨어지고 1980년대 공산주의가 몰락했다. 자유주의 시대가 됐는데 트럼프의 등장과 브렉시트 현실화로 그것마저 고장이 났다. 이제 아무 이야기도 남아 있지 않은 인류에게 정보기술과 생명기술의 쌍둥이 혁명이 다가온다. 이 변화에 대응할 새로운 이야기를 빨리 찾아야 한다.”

태원준 논설위원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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