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 DNA 되살리자] “아직도 제게는 많은 도전이 남아 있습니다”

내년부터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 위원으로 일하게 될 김미연 위원이 지난달 17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 후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 앞에서 “세계 각국의 장애 여성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앞장서겠다”고 강조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이병주 기자
 
유엔장애인권리위원에 당선된 김미연 위원을 축하하기 위한 행사가 지난 7월 10일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열렸다. 김미연 페이스북 캡처


시골 할머니는 신혼부부에게 “엎어둬라, 그러면 죽는다”고 했다. 하지만 부부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아이를 엎어두라는 얘기를 듣지 않으려고 도망을 다니다시피 했다. 내년부터 4년 동안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게 될 김미연(52) 위원이 바로 그 아이였다.

김 위원은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던 시절, 1966년 약사인 아버지 밑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백신이 부족하던 그 시절 비교적 유복한 가정이었음에도 김 위원은 생후 11개월 때 소아마비로 장애를 갖게 됐다. 왼손을 제대로 쓰지 못해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했고, 누군가 건드리기만 해도 넘어지기 일쑤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척추 수술을 한 탓에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없었다. 수술 후 회복을 위해 한 장애인 시설에서 1년을 지냈다. 그곳에는 가족이 데려왔지만 이후 소식이 끊겨 해외 입양을 가는 아이가 많았다. 군대 내무반 같은 잠자리에서 자야 했고, 입양 환송회 등에도 불려나가야 했다. 연 1∼2회 목욕을 하러 가기 위해 줄을 설 때는 동네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됐다. 어린 김 위원에게 시설에서 지낸 1년의 경험은 큰 충격으로 남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서울의 한 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지금보다 훨씬 못하던 시절, 지방의 여건은 서울보다 열악했고 장애인 시설도 대안이 될 수 없었다. 그의 부모는 딸을 지원하기 위해 서울로 이사해 학교 앞에 약국을 냈다.

어머니에게 업혀 등교했고, 하교할 때는 친구들이 손을 잡아줬다. 6학년 때는 반장에 뽑혔다. 소중한 추억이었고 엄청난 경험이었다. 장애가 있음에도 자신을 반장으로 받아준 친구들과 선생님의 지지는 이후 성장 과정에서 큰 힘이 됐다고 김 위원은 회고했다.

하지만 중학교 생활은 쉽지 않았다. 학교에서 용변을 참는 게 큰 고통이었다. 학교에는 양변기가 없어 혼자서는 화장실에 갈 수 없었다. 아버지는 딸이 자신의 뒤를 이어 약사가 되기를 기대했다. 국·영·수 과목은 전교 5등 안에 들었지만 체육과 교련 등 몸을 써야 하는 과목에선 형편없는 점수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어렵사리 당시 신흥 명문고에 입학했다. 고교생활은 오전 7시부터 밤 10시까지 입시공부였다. 약대 진학을 하고 싶었지만 교련 점수는 엉망이었고 체력장 시험 대체도 불가능했다. 심지어 당시 일부 대학 입시 공고에는 ‘지체장애인은 지원할 수 없다’는 내용도 있었다. 재수까지 했지만 실패했다.

희망이 보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대학에 실패한 뒤 고집만 세졌고 반항심이 솟았다. 집에서 나가 살겠다는 욕심에 기숙사가 있는 대학을 찾다가 한 신학대학에 86학번으로 입학했다. 졸업 무렵 100일 동안 새벽예배를 드리며 앞길을 비춰 달라는 기도를 했지만 장애인 전도사를 받아주는 교회가 없었다.

눈물로 하나님께 항의하기도 했지만 결국 기도를 통해 전인격적 구원을 받아들이게 됐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책임질 것’이라고 생각하니 걱정과 근심이 사라졌다.

신학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아버지는 약대를 권했다. 약학대학에 가려면 이과 학사학위가 필요했고 한 대학 식품영양학과에 편입했다. 공부를 따라가기는 힘들었지만 일반 대학 생활은 이후 그에게 소중한 경험이 됐다.

졸업을 앞두고 다시 벽에 가로막혔다. 식품영양사 국가자격증을 딴 김 위원은 취업을 위해 일반 회사와 기도원, 장애인직업학교 등에 원서를 냈다가 모두 실패했다. 장애인직업학교 면접관들조차 장애인인 자신을 보고 당황하는 모습을 본 그는 절망했다.

절망에 빠져 있던 그를 살린 건 동생에게서 배운 컴퓨터 통신이었다. 그가 모임 이름을 지은 ‘두리하나통신동호회’를 통해 비슷한 처지의 장애인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김 위원은 “반지하에 사는데 10년 만에 처음으로 사람을 만났다”는 한 장애 청년의 얘기를 듣고 자신이 할 일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컴퓨터 통신에는 장애인들을 세상으로 나오게 하는 힘이 있었다.

장애우대학에서 강의를 들으며 처음으로 ‘장애 여성의 인권’을 얘기하는 강사를 만날 수 있었고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4기생으로 공부하면서 스스로를 짓눌렀던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함께 걸음’이라는 소식지 객원기자로 여성 장애인 시리즈를 취재했다. 장애인이 임신하고 출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의문이 들었다. 주거 편의시설도 없고, 장애인 여성단체도 없던 시절이었다.

1994년 ‘장애인복지21’ 창간 멤버로 취직해 월급을 받는 직장인이 됐다. 1995년 9월 중국 베이징 세계여성포럼에 취재를 간 것은 그의 인생에 전기가 됐다. 당시 세계여성포럼 참여자 중에는 이미경 코이카 이사장과 강경화 외교부 장관, 신혜수 유엔 사회권규약위원회 위원 등이 있었다.

베이징 근교의 소도시에서 열린 NGO포럼에서 김 위원은 마이크를 잡고 행사의 문제점을 제기했다. 행사 장소의 접근성 문제와 자원봉사자들의 활동비용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각국 NGO들이 김 위원의 문제제기를 시작으로 “접근성을 보장하라” “장애 여성도 여성이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벌인 시위는 전 세계 언론이 주목했다. 마침 현장에서 개국 1주년을 맞아 ‘장애인을 친구처럼’이라는 주제로 취재하고 있던 국내 지상파 방송사와 인터뷰했고 장애 여성의 인권을 언급한 그의 인터뷰는 국내 장애인 단체 등에 큰 자극이 됐다.

이후 장애인 운동에 매진한 김 위원은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한 뒤 서울북부장애인복지관 기획팀장으로 3년간 일했다. 한동안 극단 ‘끼판’(끼어들어 판을 벌이자는 뜻)을 운영하기도 했다. 장애인단체총연합회 사무국장으로도 3년간 일했고 장애인차별금지법 초안을 만드는 데도 참여하게 된다.

김 위원은 2002년 8월 장애인권리협약을 위한 회의가 유엔에서 처음 열렸을 때 참여하는 등 이후 국제적으로 활동 범위를 넓히며 장애 여성 인권활동가로 맹활약했다. 열정적인 활동의 배경이 뭐냐는 질문에 김 위원은 “내 안에는 힘이 있는 이들, 권력자들에게 직언할 수 있는 또 다른 얼굴이 있다”고 말했다.

50여년을 장애인으로 살았고, 그중 절반가량은 장애 여성 인권활동가로 일했다. 지금껏 하루하루가 끊임없는 도전의 연속이었던 그에게 도전은 일상이 됐다. 그는 내년부터 자신에게 주어질 새로운 역할에 대한 기대를 이렇게 표현했다.

“도전 DNA, 그런 기질이 제 몸 안에 심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제게는 많은 도전이 남아 있습니다.”

▒ 유엔장애인권리위원은
장애인협약 가입한 177개 국가 보고서·최종견해 심사


지난 6월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 위원 선거에서 장애여성문화공동체의 김미연 대표가 99개국의 지지로 선출된 것은 놀랄 만한 일이었다. 김 대표는 선거 1라운드에서 99표를 얻어 5위를 했는데 아시아 국가 출신이 1라운드에서 이렇게 많은 표를 받은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아시아 국가 출신이라는 것 외에도 학자 출신이 아닌 NGO(비정부기구) 출신이라는 것, 비장애인이 아니라 장애인 당사자라는 것,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것 모두가 이 선거에선 불리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김 대표는 이를 모두 극복하고 당당히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 위원에 뽑혔다. 그는 2010년 국내 최초로 당선됐던 김형식 위원에 이어 내년부터 활동을 시작한다. 김 위원은 2014년 재선돼 임기가 올해 말까지다.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 위원은 18명이다. 이들은 유엔 장애인권리협약(UN CRPD·이하 협약)에 가입한 177개 당사국이 협약 비준 후 2년 이내에 제출하는 첫 국가보고서와 이후 4년마다 제출하는 최종견해를 심사하고, 이행 여부를 평가한다. 2016년 12월에 북한이 협약을 비준했기 때문에 올해 말 첫 번째 국가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내년부터 임기가 시작되는 김 위원의 첫 역할은 북한의 국가보고서를 심사·평가하는 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

김 위원은 지난달 17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을 비롯한 전 세계 장애 여성의 역량 강화가 나의 할 일”이라며 “장애인 당사자로서의 경험을 토대로 전 세계 장애 여성 문제 해결을 위해 앞장서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김 위원은 “그동안 한국에서 해온 장애인 권리 향상을 위한 노력을 국제사회에 소개할 것”이라며 “제3세계 국가에도 한국처럼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는 점을 널리 알리겠다”고 강조했다. 100여명의 법조인으로 구성된 ㈔장애인법연구회 기획이사이기도 한 김 위원은 “120여개국의 대표들을 접촉해야 하는 이번 선거 과정에서 외교부가 지원해주지 않았다면 선거에 제대로 임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정부에도 고마움을 표했다.

정창교 기자 jcgy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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