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곡은 시대다] 오랫동안 유폐된 몸의 욕망이 폭발하다


 
1970년대 가요계를 풍미한 김추자는 이른바 '신중현 사단'을 대표하는 가수였다. 육감적인 퍼포먼스와 몽환적인 창법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여성 보컬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국민일보DB
 
그의 대표곡인 '님은 먼 곳에'가 담긴 LP. 한국대중음악박물관 제공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문화평론가 이성욱은 한국의 대중음악사는 김추자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말했다. 전적인 동의를 받기는 어려운 주장이지만 이 말만큼 김추자의 의미를 높이 평가한 말은 아마도 없을 것이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1969년, 강원도 명문 춘천여고를 졸업하고 동국대 연극영화과 새내기가 된 김추자는 신중현이 프로듀서를 맡은 데뷔 앨범을 발표한다. ‘늦기 전에’를 포함해 10곡이 담긴 음반이었다. 수록곡 중 하나인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는 대한민국을 흔들었다.

그해 세상은 요란하고 복잡했다. 최초의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가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첫 비행에 성공했으며, 아폴로 11호의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은 달 표면을 밟았다. 68혁명의 여파로 프랑스의 드골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아프리카 북부의 리비아에서는 청년 장교 카다피 대위가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무너뜨렸다.

미국에서는 ‘아시아 문제를 아시아에’라고 선언한 닉슨 독트린이 발표됐다. 그러나 닉슨 행정부가 괌에서 이 선언을 발표하고 두 달 뒤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재개함으로써 베트남전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갔다. 미국 내 대학생들의 반전 시위가 폭발했다. 우드스탁 페스티벌도 열렸다. 이미 64년부터 베트남에 파병을 시작한 대한민국은 그해에 거의 5만명에 달하는 병력을 베트남 전선에 보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박정희정부는 삼선개헌안을 국민투표로 끌고 갔다. 사사오입 개헌으로 영구 독재를 꿈꾸다 불행하게 끝난 이승만 정권이 걸어간 길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박정희정부는 삼선개헌 반대를 외치며 거리로 나온 대학생들의 적이 되었다.

대학생들은 세시봉을 비롯한 음악실을 주목하기 시작했으며, 이곳 출신인 송창식과 윤형주로 구성된 트윈 폴리오는 통기타 붐을 일으키며 10대 고등학생과 20대 대학생의 새로운 스타로 떠올랐다. 바야흐로 청년문화의 물결이 대한민국을 휩쓸 채비를 거의 끝낸 것이다.

밥 딜런이 ‘The Times They Are A-Changin’(1964)에서 노래한 것처럼 시대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우리들도 바뀌어야 한다. 한국전쟁 후 60년대는 자본주의 체제를 향한 국가 재건 과정이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라는 국가적 정책 아래 자본주의화는 급속한 페달을 밟기 시작했고, 농촌 공동체 기반의 한국 사회는 공업이 중심이 된 도시화로 급격한 이행을 시작했다. 각각 일본과 미국에 뿌리를 두고 있는 트로트와 미8군 팝이라는 성인 취향의 양대 주류 문법이 정착하는 것도 바로 이 시대였다.

문화적 주도권, 성인에서 청년으로

청년문화는 한국 대중문화의 ‘제3의 길’이자 새로운 길이었다. 그것은 미국과 유럽이 이미 50년대 중반부터 그러했듯 문화적 권력이 성인에서 청년으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청년 세대의 감수성이 어른들의 취향을 전복시키는 것을 뜻했다.

깨끗하고 청아하기 이를 데 없는 남성 듀오 트윈 폴리오의 아름다운 하모니는 그 이전의 한국 대중음악을 지배해왔던 애수와 비탄의 정서를 낡은 것으로 돌리고자 했다. 의도적으로 위악을 연출한 한대수의 거리낌 없는 표현은 개인의 파격적인 개성을 전제한 자유주의를 캠퍼스의 청년들에게 새롭게 파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청년문화의 개척자들은 아직 음악홀과 캠퍼스, 그리고 심야 FM 방송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이들은 대학생이었거나 본업이 음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한대수는 코리아 헤럴드의 사진기자였다).

청년문화가 대학가 캠퍼스에만 한정되었던 것은 아니다. 62년 용산 미8군 언저리에서 탄생한 키보이스를 필두로 록밴드들이(당시 용어로는 일본식 영어인 ‘그룹사운드’) 음지에서 계속 성장해 왔는데, 60년대 말에 이르면 명동에서 종로로 이르는 중심가에 음악감상실과는 다른 ‘생음악홀’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미8군 무대나 미군이 주둔하는 지역의 기지촌 클럽이 주로 미군을 대상으로 하는 공연장이었다면 70년대에 ‘고고장’으로 거듭나게 될 이 생음악홀은 대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내국인들을 상대로 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활동하는 뮤지션들의 레퍼토리는 서구의 록음악이었지만 서서히 자신들의 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

화끈한 뭔가가 필요했던 젊은이들,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이 새로운 ‘음악적 폭발물’에 주목했다. 그룹사운드들은 음반 시장의 주역도 아니었고 미디어의 조연조차도 되지 못했지만 오로지 라이브의 에너지로 이들의 영혼을 빨아들였다. 69년 5월 서울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5·16 기념 제1회 보컬그룹 경연대회’엔 무려 4만명의 젊은 관객이 몰렸다. 새로운 음악적 도전이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을 것임을 예견케 하는 사건이었다.

밴드들의 주요 음악 장르는 당시 세계 젊은이를 매료시킨 히피즘의 상징인 사이키델릭 사운드와 하드록이었고, 가장 앞서 나간 인물이 신중현이었다. 미8군 무대밖에 출구가 없었던 시절이었다. 펄시스터즈가 신중현이 만든 ‘님아’와 ‘커피 한 잔’을 히트시키면서 신중현은 주류 시장에 진입했다. 이듬해 그는 새로운 인물을 출격시켜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된다. 바로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는 구호를 만들게 되는 김추자였다.

노래에 몸의 언어를 결합시켰다는 점에서 김추자의 등장은 하나의 혁명이었다. 이에 앞서 66년 최초의 댄스 여가수로 불린 ‘미스 다이너마이트’ 이금희의 ‘키다리 미스터 김’이 있긴 했다. 현란한 안무와 패션을 앞세운 펄시스터즈가 있었다. 미니스커트 쇼크를 선사한 윤복희도 등장했었다. 하지만 이들에게 춤은 어디까지나 노래에 부가된 부차적 콘텐츠였다.

하지만 김추자에게선 노래와 춤을 분리할 수 없었다. 그에게 춤은 본능적인 표현이었고 어쩌면 노래조차도 그 몸의 문법 속에서 나오는 듯했다. 프로듀서인 신중현조차도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김추자는 움직이지 않으면 목소리가 안 나온다. 김추자는 몸에서 노래가 나온다. 김추자의 춤은 ‘소리를 내기 위한 율동’이라고 표현하는 게 가장 정확하다.”

김추자의 패션 감각 또한 도전적이었다. ‘신동아’의 최영철 기자는 이렇게 그의 패션을 설명했다. “앨범 재킷에 나온 의상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최근 유행 패션이 망라돼 있다. 꽉 조여 상대적으로 엉덩이가 강조된 나팔바지, 목에 두른 머플러, 핫팬츠, 민소매 윗옷에 짧은 치마, 딱 붙는 가죽옷에 깊게 파인 윗도리, 골반바지…. 2007년의 스타일리스트들은 70년대 김추자 패션을 ‘이탈리아 컬렉션에서 금방 나온 디자인이라고 할 만큼 카리스마를 풍긴다’며 혀를 내두른다. 도대체 김추자와 관련해서는 ‘전위’가 아닌 것이 없다.”

김추자가 거둔 폭발적인 성공의 이면에는 몸의 본능적인 욕망을 더 이상 억압하지 않으려는 청년문화의 본질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들은 정신과 이념으로 몸의 욕망을 구금하려는 이전 시대의 도덕적 규범을 거부했다. 근엄한 시민회관의 무대와 객석을 점거했고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어둠 속에서 담배와 대마초를 피워대며 온몸을 흔들었다. 대마초가 아직 불법이 아니었던 시대, 어쩌면 이때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광란의 정점을 찍지 않았을까.

김추자의 위대함은 80년대 이후 댄스 뮤지션들의 취약점인 가창력 측면과 비교해도 압도적인 완성도와 그 완성도를 넘어서는 카리스마를 보인다는 점이다. 생명력이 충만한 그의 보컬은 역대급 전설로, 이미자와 패티김이 자리하고 있는 반열에 속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늦기 전에’를 부르짖는 그의 보컬은 천변만화(千變萬化) 하고 ‘거짓말이야’를 해석하는 그의 보컬은 경계가 없이 자유로우며 ‘무인도’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깊고 웅장하다. 이 모든 것을 갖춘, 도도하고 당당하며 자신감 넘치는 디바가 등장하는 셈이었다.

패티김이 거부한 ‘님은 먼 곳에’

그의 보컬이 정점을 찍는, 그리고 작곡가이자 프로듀서로서의 신중현에게 확고한 기반을 제공하게 되는 70년의 ‘님은 먼 곳에’는 유호 극본의 TV 드라마 주제가로 신중현에게 위촉된 노래였다. 본래 패티김이 부르기로 했던 곡이었는데, 녹음 당일 패티김이 도저히 이 노래를 못 부르겠다고 거부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이 노래에 복류하는 강렬하고도 악마적인 리듬감이 원조 디바의 정통파적인 감성과 충돌한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신중현이 리드하는 밴드의 일렉트릭 사운드가 그녀에겐 날것으로 다가간 게 아닐까.

패티김이 거부하고 떠난 뒤 갑작스러운 호출을 받은 김추자는 고작 몇 시간 만에 이 노래를 녹음해 불후의 명곡으로 만든다(패티김도 나중에 이 노래를 녹음하지만 이미 이 노래의 주인은 김추자로 각인되고 난 뒤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님은 먼 곳에’가 수록된 김추자의 2집에 패티김의 주력 레퍼토리 중 하나이자 한국 창작 뮤지컬 역사의 명곡인 ‘살짜기 옵서예’가 리메이크돼 있다는 점이다. ‘배비장전’을 각색한 이 뮤지컬의 여주인공 애랑의 타이틀롤을 맡았던 패티김이 멋진 기생이라면 김추자의 ‘살짜기 옵서예’는 농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랑으로 온 세상을 태워버릴 것 같은 애랑이었다.

‘님은 먼 곳에’는 95년 조관우가 리메이크해 성공을 거뒀으며 장사익도 훌륭하게 불렀다. 같은 제목의 영화가 2008년 이준익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고, 주제가는 거미가 리메이크했다. 주인공인 수애가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 또한 유명하다.

<강헌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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