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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풍경이 될 영월 삼동산 ‘배추고도’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덕구리 삼동산 급경사 비탈에서 자라고 있는 고랭지 배추가 이른 아침 싱그러운 초록빛을 내뿜고 있다. 초록 물결의 배추밭은 파란 하늘, 흰 구름과 어우러져 황홀경을 펼쳐낸다. 내년 이곳에 태양광 발전소가 들어서기 때문에 올해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덕구리에서 경북 봉화로 이어지는 옛 998번 지방도.
 
998번 지방도에 서 있는 빛바랜 이정표.
 
상동읍 구래리 상동광업소 입구의 꼴두바위.
 
연둣빛 이끼가 초록융단처럼 펼쳐진 ‘상동이끼계곡’.


손에 잡힐 듯 가까운 파란 하늘에 조각배 같은 구름이 두둥실 흘러간다. 그 아래로 싱그러운 초록 물결이 파도처럼 일렁인다. 녹색의 생명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지나며 더위를 밀어낸다. 강원도 영월군과 경북 봉화군의 경계인 삼동산 고랭지 배추밭이다. 강릉 안반데기, 태백 귀네미·매봉산의 유명세에 밀려 덜 알려져 있는 곳이다.

입구는 영월군 상동읍 내덕리다. 봉화군 춘양면 와흥에서도 시멘트 포장길이 이어진다. 31번 국도 내덕삼거리에서 덕구리 방향으로 들어가면 한동안 넓은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이어지다가 좁은 임도로 바뀐다. 이후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를 번갈아 지난다.

영월과 봉화의 경계 지점에 올라서면 삼동산 아래 작은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와흥에서 올라오는 길도 이곳에서 만난다. 덕구리는 원래 봉화군 춘양면에 속했으나 1963년 1월 1일 강원도 땅이었던 울진군이 경북으로 이속되고, 덕구리와 천평리가 상동으로 편입됐다고 한다. 고랭지 채소밭은 1970년대에 조성됐다.

마을을 지나 좁은 길을 오르면 초록색 들판이 눈을 가득 채운다. 하늘 아래 경사진 산기슭이 온통 배추밭이다. 현기증이 일 정도의 급경사 비탈에 출하를 앞두고 나날이 몸을 불리는 배추가 촘촘한 등고선을 그리고 있다. 눈이 시리도록 짙은 초록이 파란 하늘, 흰 구름과 어우러져 끝없는 장관을 펼쳐낸다. 이른 아침 햇살에 황금색으로 물든 배추는 ‘금추’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황홀하다. ‘윙윙’ 소리 내는 풍력발전기도 없어 한적한 풍경이 조용히 마음속에 내려앉는다.

해발 900∼1000m 고지에 위치해 있지만 길이 잘 닦여 있어 승용차로도 편하게 오를 수 있다. 길은 트럭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다. 가파른 비탈을 이리저리 구불구불 휘감아 돌며 오르는 농로는 ‘배추고도’를 만들어낸다. 올여름 폭염에 인근 매봉산 등의 배추가 큰 해를 입은 것과 달리 이곳 배추는 싱싱함을 자랑한다. 한여름에 이곳을 찾더라도 바람막이용 외투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특히 이른 아침에는 10도 안팎이어서 초겨울 같은 한기를 느낄 수 있다.

고랭지 배추는 오래 기다려 주지 않는다. 곧 시작되는 수확이 끝나면 1년을 기다려야 한다. 더구나 덕구리 배추밭은 마지막 풍경이다. 내년에 전체 99만㎡(30만평) 가운데 3만∼6만㎡(1만∼2만평)를 제외한 대부분 배추밭이 태양광 발전소로 바뀐다고 한다. 초록 물결 대신 검은 태양광전지판으로 뒤덮인다.

배추마을에서 봉화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길이 있다. 옛날 998번 지방도가 우구치리 금정마을까지 이어진다. 과거 30년 전에는 영월에서 대구로 가는 시외버스가 다녔다고 한다. 1995년 88번 국지도가 영월 내리 방향으로 새로 개통되면서 지금은 버스가 다닌 길이라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험하고 높은 길로 남아 있다.

산으로 들어서면 길은 오지의 맛을 물씬 풍긴다. 숲이 우거져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곳도 많다.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차량도 뒤에서 따라오는 차량도 전혀 없다. 춘양목으로 불리는 금강송이 붉은 피부를 자랑하며 미끈하게 서 있다. 산속의 맑은 공기와 바람 소리 푸른 나무와 산짐승, 새만 있을 뿐이다. ‘봉화 52㎞, 금정 8㎞’. 산길에서 만난 빛바랜 도로표지판이 반갑다.

길을 따라 전봇대가 눈에 보인다.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牛口峙)마을에 전기를 공급해준다. 전깃줄이 오지마을을 도시 문명과 이어주는 끈처럼 보인다. 우구치는 재를 넘어가는 골짜기 모양이 소 입 모양을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길을 휘돌아 내려서면 상(上)금정마을에 닿는다. 폐교된 금정초등학교가 을씨년스럽게 폐허로 변해있고 폐가도 심심찮게 구경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금광에서 물이 많이 나와 금을 캐는 것이 마치 우물 속에서 금을 기르는 것과 같다고 해서 금정(金井)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한창때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가는 금 산지였다.

상동읍도 옛 영화를 뒤로하고 쓸쓸히 남아 있다. 한때 대한중석 상동광업소의 도시로 불렸다. 상동광업소는 6·25전쟁 직후인 1952년 국영 대한중석광업으로 인수돼 국내 중석(텅스텐) 생산량의 80%를 차지했다. 1969년까지 대한민국 총 수출량의 56%, 외화벌이 1위를 기록할 정도였다. 한마디로 ‘돈이 넘쳐나는 상동’이었다.

1971년 말 상동 인구는 총 2만2600여명에 달했다. 하지만 1994년 2월 상동광업소 폐광 여파로 인구이탈이 급격히 진행되면서 2010년 말 거주인구는 1200여명으로 추락했다.

상동광업소 입구 구래리에 꼴두바위가 있다. 화강암으로 이뤄진 층암괴석의 거암(巨巖)으로, 고두암이라고도 불린다. 웅장한 형세와 기묘한 형상이 좌우의 산들과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이룬다. ‘꼴’은 ‘형상’, ‘두’는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으뜸가는 형상’을 지닌 바위라는 의미다.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이 1580년(선조 13년)쯤 강원도관찰사가 됐을 때 강원도 땅을 두루 돌아보다가 꼴두바위 앞에 이르러 ‘먼 훗날 이 바위 때문에 심산유곡인 이곳에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바위를 우러러볼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말처럼 1923년 바위 인근에서 중석 광산이 개발되면서 전국에서 수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꼴두바위에는 아이를 못 낳아 시어머니에게 갖은 구박을 받던 며느리의 애달픈 전설도 전해져 내려온다. 바위 앞에서 득남을 기원하며 100일 치성을 드리던 여인이 100일을 못 채우고 목숨을 잃었는데 하늘에서는 이 여인 대신 꼴두바위로 하여금 중석을 잉태하게 해 한을 풀어줬다고 한다.

인근 상동읍 천평리에 위치한 칠랑이골은 태백산 줄기의 준령이 빚어낸 태곳적 신비를 갖춘 계곡이다. 하늘을 찌를 듯한 소나무가 이루는 깊은 그늘과 집채만 한 둥근 바위들 사이로 옥빛의 청정한 물이 쉼 없이 흐른다. 여기에 곳곳의 기암절벽이 장관을 이루며 한국의 원시계곡으로 불리기도 한다.

칠랑이골은 신라시대에 7명의 화랑이 수련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다. 칠랑이골에 7자매를 둔 농부가 살았는데, 계곡물이 맑고 깨끗해 이 물을 먹고 자란 자녀들이 모두 견줄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 훗날 대갓집으로 출가해 부귀영화를 누렸다는 얘기도 있다.

계곡 한편에 평창 장전, 삼척 무건리와 더불어 3대 이끼 계곡 중 하나로 소문난 ‘상동이끼계곡’이 자리한다. 바위와 나무 등에 붙은 연둣빛 이끼가 초록융단처럼 펼쳐져 있다. 흐르는 맑은 물과 함께 신비로운 모습을 자아낸다. 이끼 바위를 타고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있으면 세상 시름과 한여름 더위를 잠시 잊을 수 있다.

▒ 여행메모 중앙고속도로 제천IC에서 38번 국도 이용
다슬기·한우·곤드레·막국수… 맛난 먹거리


수도권에서 승용차를 이용하면 중앙고속도로 제천나들목에서 빠진다. 38번 국도를 타고 영월읍내를 지나 석항리에서 31번 국도로 갈아탄다. 중동면소재지를 지나 20여분만 더 가면 상동읍에 닿는다. 내덕삼거리는 상동읍 직전에 있다. 상동삼거리에서 우회전해 31번 국도를 계속 가면 칠랑이골로 접어들고 직진하면 꼴두바위에 닿는다. 동서울, 센트럴시티터미널에서 영월읍내까지 버스가 운행중이며, 청량리역에서 영월역까지 열차를 이용할 수도 있다.

읍내에 퀸모텔·테마모텔 등 모텔이 몇 곳 있다. 최근 새로운 호텔도 들어섰다. 동강 등 래프팅이 성한 곳마다 펜션이 즐비하다. 동강시스타콘도는 동강을 내려다보는 전망에 스파시설 등을 갖춰 가족여행객에게 알맞다.

영월의 먹거리로 다슬기를 빼놓을 수 없다. 해장국 외에도 무침, 전, 비빔밥 등의 재료로 사용된다. 영월역 앞에 다슬기식당이 모여 있다. 다슬기향촌(옛 성호식당·033-374-3215), 동강다슬기(033-374-2821) 등이 유명하다.

한우도 인기다. 주천면의 다하누한우프라자(033-372-2280)가 손에 꼽히지만 곳곳에 전문식당들이 있다. 읍내에는 유명한 곤드레밥 식당도 많다. 장릉 옆 골목의 장릉보리밥집과 장릉손두부 등도 맛집이다. 상동식당의 막국수 맛도 그만이다.

영월=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hcn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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