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걸인·빈민 구제 애끓더니 스물넷에 스러지다

방애인 (1909∼1933)
 
일제 강점기 ‘방애인 선생’이 부임해 학생들을 가르쳤던 전북 전주 기전여학교. 지금은 기전여중·고교와 기전여대가 됐다. 사진은 기전여대 본관으로 경사지붕 박공 부분의 타일 모자이크 성화가 미션스쿨임을 말해준다. 조형물은 이 학교 출신 양궁선수들의 올림픽 메달 획득을 기념해 설치한 것이다.
 
1929년 3월 2일 전주여자기독청년회원들과 함께한 사진. 앞줄 왼쪽 세 번째가 방애인 선생이다(위 사진). 일제강점기 전주고아원. 방애인 선생이 전주서문교회 전도실에서 시작했고 전주YWCA가 운영했다(가운데). 기전여학교 학생들이 학교를 나와 서문교회 예배 참석을 위해 전주천변을 걷고 있다. 교회는 전주천 건너 맞은편에 있었다(아래 사진).
 
스물넷에 요절한 방애인 선생의 봉분 조성 후 전주여자기독청년회원들이 묘소 주변에 모여 찍은 사진(위 사진)과 전주YWCA 임경진 사무총장 등이 지난주 완주 묘소를 참배하는 모습(가운데 사진). 전주서문교회 종탑과 본당 모습. 방애인 선생은 서문교회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며 고아를 돌보는 사역도 함께했다(아래 사진).
 
배은희 목사



개화한 조선의 기독여성이 예수의 사랑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대개의 개화여성이 ‘모던 걸’로 불리며 한껏 멋을 부릴 때 황해도 황주의 신여성 방애인은 수재민을 위해 모금을 하고 가난한 이웃을 보살폈다. “저 미모에 왜 독신으로 사는지 모르겠다”고 수군댔으나 “저는 주님께 바쳤습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조선의 성자 방애인’. 이 알려지지 않은 한국 초대교회 기독여성은 기독교회사만이 아니라 현대 한국교육사와 사회복지사에 기록돼도 손색이 없는 선각자이다. 스물넷의 나이에 요절한 기독청년. 교사였고, NGO 활동가였으며, 사회복지사였던 지혜로운 여인. 고아와 병자를 돌봤고 빈민을 교육한 그녀였다. 고향은 경의선이 지나는 황해도 황주였고, 순교지는 경전선(초기 선로)이 지나는 전북 전주였다.

방애인이 알려진 것은 1933년 성탄절에 발행된 ‘방애인 소전’(성서연구사 간)의 역할이 컸다. 이 문고본 정도에 지나지 않은 작은 책자가 없었더라면 그저 밀알로 땅에 뿌려졌을 것이다. 하나님 상급만이 있었으리라.

‘방애인 소전’은 그가 출석했던 전주서문교회 담임 배은희(1888∼1966) 목사가 집필했다. 배 목사는 방애인이 시름시름 앓으면서도 부랑 나환자(한센병자)와 정신병자를 거두는 등 제 몸을 살피지 않는 헌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1933년 9월 그가 강원도 선교 일정 중일 때 방애인이 숨을 거두자 더 없이 비통해 했고, 곧바로 집필에 들어가 ‘철필 기록’으로 남겼다. 이 책은 1948년 8월 15일자로 13판을 찍었다. 그리고 1978년 3월 복간본, 2002년 11월 현대어 번역본으로 발행됐다.

최근 이 조선의 성자 방애인의 자료를 찾던 중 귀한 사료 하나를 확인할 수 있었다. 1925년 8월 17일자 ‘시대일보’ 기사였다. 현대어로 풀자면 다음과 같다.

‘경의선이 지나는 황주읍 황주장로교회에서 황주청년회를 비롯한 5개 사회단체가 수재민구제음악회를 개최했다. 최근 전국을 강타한 폭우로 한 차례 연기됐던 이 음악회에는 수재민을 도우려는 관중이 입추의 여지없이 몰렸다. …이날 음악회는 방애인, 임성의양의 풍금연주, 유시청군의 바이올린 독주, 차재익군의 독창이 이어졌다. …장로교는 이날 수재의연금으로 10원을 냈다.’

‘방애인 소전’ 기록에는 ‘방애인이 평양 숭의여학교 3학년 때인 1923년 학교 내 불상사로 인해 학우들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방애인도 부득이 개성 호수돈여학교로 전학해 1929년 3월 23일 최우등으로 졸업했다’고 한 점에 미루어 호수돈여학교 재학 시절 수재민돕기 음악회에 출연한 것으로 추측된다.


구제하다 요절한 기독 교사… 당시 신문 기사 처음 확인

지난 주말 오전. 전북 완주군 비봉면 소농리 비봉초교 뒤쪽 산자락 전주서문교회 묘원 가는 길은 마치 휴양림 길을 걷는 것처럼 길 양쪽이 울창했다. 이른 아침인데도 땀이 흘렀다.

그 한여름의 묘원. 방애인 묘소에서 간절한 기도가 이어졌다. 전주YWCA 임경진(52) 사무총장과 전주YWCA청소년상담센터 김은진(43) 국장이었다. 방애인은 전주여자기독청년회(현 전주YWCA) 활동에 누구보다 열심이었고 요절 후 그의 묘소를 찾아 추도예배를 이어온 이들도 여성 기독청년들이었다. 지금도 ‘방애인선생기념사업위원회’ ‘방애인봉사단’ ‘방애인봉사상’ ‘조선성자 방애인 뮤지컬’ 등으로 그 정신이 이어지고 있다.

임 총장이 기도가 끝난 후 풍화된 비문을 읽어 내렸다. “‘선생은 교육자요 전주여자기청(여자기독청년회)의 중진이요 고아 구호의 공적자이다….’ 우리는 여느 때보다 풍요롭게 사는데 정작 사람들은 사랑에 굶주려 있어요.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의 긍휼을 실천하려 했던 선생의 정신이 더욱 절실해 질 수밖에 없어요.”

방애인 묘지는 그가 섬기던 전주서문외교회(현 전주서문교회)와 기전여학교(현 기전여중·고교 및 기전여대)에서 30㎞가량 떨어져 있다. 별세 직후 전주화산공동묘지(전주시 중화산동)에 묻혔으나 도시정비에 따라 이장됐다.

방애인은 방중일 김중선 부부의 장녀로 태어나 어머니와 할머니의 기도 가운데 신앙 안에서 자랐다. 그의 조부 방흥복은 자선사업을 많이 해 지역 사회에서 꽤나 알려진 사람이었다. 방애인은 황주양성학교(1915년 설립)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웠다. 미션계통의 학교였다.

그는 총명했고 규칙을 잘 지켰다. 전교 최우등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곧바로 북서지방 제일로 꼽히는 평양 숭의여학교에 진학했고 여기서도 생활과 성적 모두 모범을 보였다. 개성 호수돈여학교에서도 늘 신앙 안에서 반듯했다.


그는 호수돈여학교 재학 시절 채플 시간에 배은희 목사의 설교에 감화받아 친구 정임(방애인 소전 기록)과 함께 배 목사와 연락을 주고받았고 학교 졸업 후 배 목사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전주 기전여학교 교사로 정임과 같이 부임하게 된다.

그는 부임 후 전주의 첫 교회 서문외교회에 출석하며 이 교회가 인근 마을 뒷골과 바구말에 세운 유년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전도했다. 전주서문외교회는 미국 북장로회가 전주선교부를 설립한 후 1897년 전주천변에 세운 교회였다. 전주천 건너편에 전주예수병원, 신흥학교(현 신흥중·고교 및 예수대)와 기전여학교 등도 연이어 설립됐다. 전주성 서문 밖은 선교타운이었던 것이다.

방애인은 교사로 부임 후 학교 수업을 마치면 거리로 나가 걸인과 빈민을 돌봤다. 단정했고 경건했으며 늘 성경을 읽었다. 또 문제가 발생하면 기도로 풀었다. 교회를 비난하는 청년들을 ‘미신’으로 볼 만큼 신앙의 자세가 굳건했다.

그가 남긴 일기의 한 대목.

나는 처음으로 신의 음성을 듣는다. 눈과 같이 깨끗하라. 아아 참 나의 기쁜 거룩한 생일이다.’(1930년 1월 10일) ‘나는 어디에선가 손뼉 치는 소리로 세 번 부르는 음성을 듣고 혼자 신성회에 가다. 아아 기쁨에 넘치는 걸음이다.’(1930년 1월 11일)

영적 충만을 얻은 그는 전도와 구제에 더욱 열심을 냈다. 배 목사의 목격담.

“어느 날 길가에 많은 사람이 둘러섰다. 할머니 정신병자를 에워싼 사람들이 놀리며 떠들었다. 노파는 반항과 저주로 중얼거리면서 슬퍼하였다. 이를 본 애인양이 병자 곁으로 고요히 가서 울면서 손을 잡아 인도하였다. 둘러선 구경꾼들도 감격의 눈물에 젖었다. 애인양은 그를 학교 부근 강필남씨의 집에 데려다 두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방애인의 일기.

‘불쌍한 할머니를 수남이 어머니 댁에 두고 목욕시키고 새 옷을 입히고 식비를 담당하기로 하다.’

그런데 이 할머니의 광기가 통제 불능이었다. 수남이 어머니가 당장 나가라고 하자 ‘나는 너무 할머니가 가엾어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했다’고 적었다. 그리고 ‘아아 이는 나의 짐이다. 그러나 주께서 맡으시니 나는 평안하다’고 마무리했다.

이러한 자세는 교회 전도실에 고아를 데려다 입히고 재워 전주고아원 설립으로 이어진다. 또 병원이 감당 못하던 정신병자와 나환자에 대한 보살핌과 영적 위로로도 계속됐다. 방애인은 고아원 건축에 따른 기부금 마련 중에 은혜와 고난이 있을 때마다 40일 금식기도로 하나님을 찾았다.

와중에 전주 지방에 큰 수재가 났다. 전주천변(현 다가공원 주변)에 수재민 위주의 빈민굴이 형성됐다. 방애인은 수중에 돈이 없어 그들을 도울 수 없었다. ‘(빈민굴 사람들은) 마치 술 담배 아편 기생을 위하여 사는 것 같다’고 한탄하면서도 자신의 시계와 만년필을 팔아 가난한 이들을 먹이고 전도했다.


병든 노파 광기에도 “주께서 맡으시니 나는 평안하다”

교사로서 본분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김시은이라는 학생이 미국 조선인교회에 시무하는 목사 아버지로부터 연락이 없어 슬퍼하자 “나는 시은이의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한 후 간절히 기도했다. 몇 날이 못 되어 평안하다는 편지가 왔다. 아아 얼마나 기쁘냐. 감사합니다. 내 주여”라며 행복해했다. 그는 표(表)를 그려 졸업생까지 적은 뒤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또 여성 기독청년회원들과는 야학(현 전주 서신동 감나무골)을 세워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기도와 헌신에 열심이었으나 먹는 것을 주저했다. 자기 입에 들어가는 것조차 아까워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병색이 짙어졌다. 그럼에도 1933년 4월 그는 전주서문외교회 여자조력회에서 ‘살 터이냐, 죽을 터이냐’라는 제목으로 설교해 잠자는 영혼들을 흔들었다.

방학에도 집에 오지 않고 시집도 안 가는 딸을 걱정하는 부모의 편지를 받고 ‘불효한 딸을 아무 염려 마시옵소서. 저는 주님을 위하여 살 수밖에 없습니다. 독신으로 병이 나더라도 선을 행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면 외롭지 아니합니다’라고 답할 정도로 구령에 힘을 쏟았다.

방애인은 그해 9월 16일 열병으로 숨을 거뒀다. 수십 명의 소복 여인들이 나서 상여를 멨다. 그로부터 사랑받았던 고아 나병 환자 학생들이 뒤를 따랐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는 말을 안고 방애인은 공동묘지에 평안이 누웠다.


‘방애인 소전’을 펴내 널리 알린 신앙 스승·정치가 배은희 목사

배은희(사진) 목사는 경북 달성(현 대구 달성) 출신으로 평양신학교 졸업 후 달성 경산 청도에서 선교활동을 펼쳤다. 이후 전주 서문교회에 부임, 유치원과 무산아야학(無産兒夜學)을 개설하고 전북 전도에 힘썼다. 신간회 전주지부장으로 민족주의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는 신사참배 거부로 한때 사임하고 고난을 당했다. 해방 후 전북치안대책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1951년 경북 달성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정치가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방애인 소전’ 13판 발행 서문에 “기독청년에게 희생은 사랑이다”라며 “청년들이 조선 교회를 살리자”고 역설했다. 조국은 방애인양과 같은 희생자를 부른다며 십자가의 더운 피를 강조했다.

전주·완주=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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