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곡은 시대다] 민주주의 향한 열망이 만들어낸 시민의 노래


 
가수 손인호의 명곡 ‘비 나리는 호남선’이 담긴 음반이다. 1927년 평안북도 창성 출신인 그는 2016년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비 나리는 호남선’ 외에도 ‘해운대 엘레지’ ‘울어라 기타줄’ 등을 히트시켰다. 데뷔 이후 오랫동안 방송에 출연하지 않아 ‘얼굴 없는 가수’로 불렸다. 대중음악평론가 최규성씨 제공
 
생전에 그가 '가요무대'(KBS1)에 출연했던 장면(왼쪽 사진)과 젊은 시절 고인의 모습이다. 방송화면 캡처, 대중음악평론가 최규성씨 제공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승만 정권의 난맥상은 날이 갈수록 도를 더해갔다. ‘국부(國父)’라는 상징성 하나만을 간신히 지닌 노정객 한 명에 의지한, 무능과 부패의 정치깡패 집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들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 휴전 다음 해인 1954년 11월 27일 국회에서 일어난다.

이미 재선인 이승만 대통령은 제3대 대통령 선거에는 출마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해 5월 총선에서 압도적인 다수 의석을 차지한 자유당은 이승만의 종신 집권을 위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없애는’ 헌법 개정안을 제출했는데, 개정안은 11월 27일 국회 표결에서 가결 정족수에 딱 한 명이 모자라는 135명만이 찬성표를 던져 부결된다.

자유당의 개정안 자체가 헌정을 유린하는 폭거였으므로 이 안의 부결은 그야말로 불행 중 다행스러운 것이었으나 이틀 뒤 상황이 바뀐다. 동대문의 정치 깡패 이정재와 그의 휘하에 있는 폭력배들이 방청석을 장악하고 당시 대한수학회 회장이었던 최윤식 교수까지 동원한 자유당은 사사오입(四捨五入), 즉 반올림 원칙을 앞세워 투표 결과를 가결로 번복하는 난동을 획책한 것이다. 헌법을 개정하기 위해선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인 135.33명이 필요한데 0.33명은 있을 수 없으므로 반올림에 의해 의결정족수는 135명이면 된다는 해괴망측한 논리였다. ‘사사오입 개헌’이라고 불리게 된 이 헌법 개정은 대한민국 역사상 헌법을 짓밟고 공화국 체제를 모욕한 가장 희화적인 사건이었다.

이와 같은 종신 권력을 향한 헌정 유린은 72년 유신시대에 다시 한 번 재현된다. 카를 마르크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쓴 유명한 문장, 즉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를 한국 현대사에 그대로 대입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희극으로, 또 한 번은 비극으로.’

사사오입 개헌 후 해가 바뀐 55년, 쿠바 출신의 밴드 페레즈 프라도 악단의 맘보 리듬은 전국에 춤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전국의 주요 지역엔 미군부대가 들어섰다. 그 부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기지촌에 기생해야 했던 황량한 전후 시대였다. 모든 것이 궁핍했고, 유교적 도덕률은 일거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전쟁 중 서울대 음대를 중퇴하고 대중음악 작곡가의 길로 들어선 신예 작곡가 박춘석은 이때 박단마그랜드쇼 단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목포 공연 때문에 호남선 기차를 타고 가던 중 차창을 때리는 보슬비를 보며 떠오른 악상으로 멜로디를 만든다. 그는 호남의 노래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작사가 손로원에게 가사를 의뢰했고, 이렇게 해서 이듬해인 56년, 전국을 뒤흔든 노래가 탄생한다. 바로 ‘비 나리는 호남선’이다.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사랑이란 이런가요 비 나리는 호남선에

헤어지던 그 인사가 야속도 하더란다

‘비 나리는 호남선’ 1절



멜로디가 먼저 만들어지고 노랫말이 뒤에 붙은, 당시로선 희귀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이 노래는 갓 데뷔해 박춘석의 노래 ‘나는 울었네’로 스타덤에 오른 손인호의 목소리로 56년 2월쯤에 녹음됐다. 박춘석은 이 노래가 히트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물줄기가 이 노래에 승천의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56년의 봄은 뜨거웠다. 민심은 이승만의 종신 집권을 막기 위해 55년 결집한 민주당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민주당이 내세운 후보는 해공 신익희. 임진왜란 때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한 신립의 후손으로 3·1운동에 참가한 뒤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그는 민족주의 우파의 대표적 인물이다. 신립과 신사임당을 배출한 가문 출신이어서인지는 몰라도 청년 시절부터 사회주의에 대해선 냉담했다. 미국 육군 24군단장이며 미군정 책임자인 존 하지 중장과는 앙숙이었다. 46년 8월에는 미군정을 상대로 쿠데타를 계획하는 대담함을 보였다. 하지만 이 모의는 미군 방첩대에 정보가 새는 바람에 실패로 끝난다. 하지는 체포된 신익희에게 다시 한 번 일을 벌이면 사살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보내고 풀어주었다.

신익희는 47년 이후 김구가 수장인 임시정부 측과 갈라서고 이승만과 손을 잡게 된다. 제헌 국회에 진출해 국회의장이 되지만 이승만과의 허니문은 길지 않았다. 그는 정부가 수립되자 인촌 김성수와 연대해 대표적인 야당 정객으로 부상한다. 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민주당 대권 주자가 된 것이다. 그는 진보당 당수 조봉암과의 단일화 협상에 나서고, 열차와 버스를 이용한 전국적인 유세에 돌입한다.

민초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신익희가 내세운 여덟 글자의 간결한 구호, ‘못 살겠다! 갈아 보자!’는 엄청난 호소력을 분만하며 대중에게 다가갔다. 이 반응에 놀란 이승만 캠프는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유명한 대응 논리를 폈다. 신익희의 유세 때마다 기록적인 인파가 몰려들기 시작하더니 5월 2일 한강 백사장 유세에선 30만명이 넘는 인파가 모였다. 당시 서울 인구가 160만명, 유권자 수가 70만명 정도임을 고려한다면 엄청난 열기였다.

선거를 통한 평화적인 정권 교체가 눈앞에 보이는 듯했고, 민초들의 기대감은 날이 갈수록 부풀어갔다. 그러나 그로부터 3일 뒤인 5월 5일 새벽, 호남 유세를 위해 호남선 기차에 올랐던 그는 기차 안에서 뇌일혈로 쓰러졌고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그날 오후 4시, 신익희의 운구가 서울역에 도착하자 운집한 군중들이 그의 유해를 경무대 쪽으로 끌고 가려는 움직임이 일었고, 이 과정에서 경찰과 충돌하면서 1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700여명이 검거되기도 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정권 교체의 희망은 물거품이 됐고, 대중은 그를 추모하는 마음을 때마침 발표된 노래 한 곡에 모았다.

그것이 바로 ‘비 나리는 호남선’이다. 이 노래는 정치와, 더군다나 신익희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위로받을 길 없던 대중은 이 노래에 자신의 감정을 투사했고 자연스럽게 스토리를 만들었으며 신익희를 향한 추모의 열망을 이 노래로 대신했다. 손인호의 다정다감한 목소리는 슬픔을 더욱 극적으로 승화시켰고, 위안의 감수성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이 노래를 둘러싸고 그럴듯한 ‘가짜 뉴스’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져 인구에 회자됐다. 해공은 암살된 것이며 이 노래의 가사는 해공의 부인이 썼다는 것. 작사가와 작곡가, 가수 모두 줄줄이 수사기관에 불려가 취조를 당하는 곤욕도 치렀다. 이들은 이 노래가 전해에 만들어진 것이며 음반도 선거 3개월 전에 나왔다는 것을 증명하고서야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이 노래는 제2의 ‘목포의 눈물’이 됐다. ‘목포의 눈물’이 식민지 시대 민족의 노래가 되었다면 ‘비 나리는 호남선’은 독립 공화국 시대에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시민의 노래였다.

이승만은 생애 최대의 정치적 위기에서 라이벌의 죽음으로 기사회생했다. 사실상 무투표 당선이나 다름없는 선거에서 그가 얻은 표는 500만표를 간신히 넘겼을 뿐이다. 후보 단일화 중에 해공의 죽음으로 무소속으로 출마한 조봉암이 무려 216만표를 얻었다. 하지만 놀라운 대목은 이미 후보 자격을 잃은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가 무려 185만표나 나온 것이다.

그리고 따로 진행된 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장면 후보가 이승만의 정치적 아들인 이기붕을 근소한 차이로 꺾는 기염을 토한다. 야권이 본래 합의한 대로 단일화를 이뤄 선거에 임했으면 해공 신익희의 승리가 거의 자명했음을 알려주는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 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했으면 평화적인 정권 교체의 모델을 만들었을 것이고, 그 이후의 한국 정치사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전개됐을지도 모른다. 이승만 정권은 이렇게 연장됐으며, 4년 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처참하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해공 신익희 추모 신드롬과 맞물린 ‘비 나리는 호남선’의 열풍은 5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 최고의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노래의 성공은 대중음악이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시대의 정신을 반영하고 담아내는 감수성의 그릇이라는 점을 증명했다.

4년 뒤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상황은 비슷하게 반복된다. 선거를 앞두고 야당인 민주당 후보 조병옥이 선거를 한 달 앞두고 미국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남으로써 이승만이 또다시 무투표 당선으로 권력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4년 전의 패배를 부정 선거로 뒤엎으려 한 이기붕의 야심이 사달을 내고야 만다. 앞서의 선거에서 이승만과 맞섰던 조봉암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선거가 끝나고 2년 후인 58년 이승만 정권은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사법 살인하는 폭정을 자행했다. 미국이 이승만에게 등을 돌리게 된 결정적인 분기점은 바로 조봉암에 대한 정치적 살인에 기인한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조봉암의 무리한 사형 집행과 조병옥의 사망으로 다시 희망이 좌절됐을 때 대중은 제2의 ‘비 나리는 호남선’ 신드롬을 기획한다. 바로 박재홍의 ‘유정천리’가 그것이다. 이 노래는 4·19혁명이 일어나기 전인 59년에 개봉한 동명의 영화 주제가다. 4·19 당시 사람들은 이 노래 가사를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이 노래의 원래 가사는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 감자 심고 수수 심는 두메산골 내 고향에’로 시작한다. 하지만 대중은 이 가사를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 선생 뒤를 따라/ 장면 박사 홀로 두고 조 박사도 떠나갔다’라고 노래했다. 대중은 노래에 시대성과 역사성을 묻기 시작했고, 그 질의에 대한 응답은 박정희 시대에 이르러 꽃을 피우게 된다.

강헌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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