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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어디까지 왔고 어디로 가는지 들려드려요”

최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만난 물리학자 정재승. 신간 ‘열두 발자국’을 펴낸 그는 “완성된 책을 보니 ‘이 정도면 애를 참 많이 쓴 작품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며 미소를 지었다. 최종학 선임기자


아마도 물리학자 정재승(46)은 국내 강연 시장에서 첫손에 꼽히는 스타일 것이다. 매달 그에게 답지하는 강연 요청은 1000건에 달한다. 지난 1월엔 TV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해 유시민 작가와 가상화폐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였는데, 이때는 방송이 나가고 일주일 만에 강연 요청이 1200건 넘게 들어왔다고 한다. 사람들은 무슨 이유에서 정재승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걸까. 최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만난 정재승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사회에는 이해하기 쉽게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면서,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까지 설명해주는 사람은 별로 없는 거 같아요. 그런데 저는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왔죠. 물론 제가 뭔가를 재미있게 설명하기 때문에 호응해주시는 걸 수도 있겠네요(웃음).”

정재승을 만난 건 그가 최근 펴낸 신간 ‘열두 발자국’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이 책은 그가 2001년 출간한 ‘정재승의 과학콘서트’(이하 과학콘서트) 이후 17년 만에 발표한 단독 저서다. 알려졌다시피 과학콘서트는 70만부 넘는 판매고를 올린 희대의 과학책이었다. 후속작을 내자는 요청이 이어졌을 건 불문가지다. 그런데 왜 정재승은 지난 17년 동안 단독 저서를 내지 않았던 걸까.

“신작은 과학콘서트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독자들이 저에게 기대하는 건 뭔지, 저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죠. 그러다가 내린 결론이 이거예요. 학문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이 잠시 뒤돌아서서 대중에게 우리는 어디까지 왔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들려주는 책. 열두 발자국에는 바로 이런 얘기를 담았어요.”

열두 발자국은 뇌과학의 렌즈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들여다본 작품이다. 제목은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가 펴낸 ‘소설의 숲으로 여섯 발자국’에서 빌려왔다. 열두 발자국은 “인간이라는 미지의 숲을 탐구하면서 과학자들이 내디딘 열두 발자국”에 대한 이야기다. 정재승이 지난 10년간 펼친 강연 가운데 호응이 좋았던 12개 강연을 글로 다듬어 책으로 엮었다.

책에는 무언가를 선택할 때 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결정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지, 우리는 왜 미신에 빠져드는지 분석한 내용이 차례로 이어진다. 제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변화를 내다보면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조언한 내용도 등장한다. 강연을 하듯 경어체로 썼고, 청중의 추임새까지 곁들였다. 서점가에 차고 넘치는 뇌과학 관련 경쟁작들을 너끈히 제칠 만큼 확실히 재밌는 작품이다.

“책에 담을 강연을 선별할 때 제가 세운 기준은 이거였어요. ‘지금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질문은 무엇인가.’ 그러면서 고민한 건 술술 읽히는 책을 만들자는 거였죠. 과학을 구술(口述)의 형태로 풀어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교양의 문화로 만들고 싶었어요.”

대중에게 정재승은 과학의 진귀한 정보들을 이해하기 쉽게 소개하는 ‘지식 소매상’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이런 평가는 억울하게 느껴질 수 있다. 정재승은 강연이 없는 날엔 실험에 몰두하고 학생들과 각종 연구를 진행하는 평범한 학자다. 그는 “사람들이 나를 가리키며 ‘과학 전도사’라고 말하는 게 때론 불편하거나 서운하게 느껴지곤 한다”고 말했다.

“언젠가 뇌과학의 역사를 다룬 책을 쓰고 싶어요. 이런 책이 국내에 나온 적이 없는데, 이걸 쓰려면 정말 방대한 지식을 알고 있어야 해요. 만약 제가 그런 작품을 펴내게 된다면 대중들이 저를 학자로 재평가하면서, 저를 다르게 바라보게 될 겁니다.”

정재승의 어린 시절 꿈은 천체물리학자였다. 인간의 뇌도 작은 우주라고 할 수 있으니 그는 꿈을 이룬 사람이라고 해도 아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만약 과학자가 되지 않았다면 그는 어떤 삶을 살게 됐을까. 그는 “인류학자가 됐어도 좋았을 것”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인류학은 뇌과학과 반대의 지점에 놓인 학문인 거 같아요. 뇌과학은 내면의 세계를 탐사하는 분야지만, 인류학은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학문이니까요. 건축가가 됐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가끔 해요. 과학자의 삶은 뻔하거든요. 고민하고 실험하고 논문을 쓰는 게 저의 일상이죠. 하지만 건축가는 눈에 보이는 뭔가를 만드는 일을 하니 부러울 때가 많아요.”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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