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윤중식] 수혈 거부에 관한 단상



그 집단의 신도를 처음 만난 것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가 쏜 권총에 쓰러졌던 1979년 인천 송도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다. 애국가를 작사한 윤치호 선생이 1906년에 설립한 미션 스쿨이라 성경 과목이 별도로 있었지만 개인의 신앙은 자유로웠다.

인천시 간석동 산동네에서 처음 만난 그는 잊을 만하면 찾아왔다. 그는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선배라면서 열변을 토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서 세상을 통치하는 왕과 제사장으로 봉사하며 인류를 심판하는 배석 심판관의 역할을 한다. 여호와의 왕국의 기간은 1000년이 될 것이다. 이 기간이 차면 최고 재판관인 여호와로부터 최후적인 심판을 받는다. 그때 이 땅은 낙원으로 회복돼 영원한 여호와의 왕국이 시작된다.”

“인류 평화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들은 총을 들지 않는다”는 말도 했다. 어릴 때부터 ‘나라에 충성, 부모에 효도’라는 말을 듣고 자란 필자로서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한편으론 호기심이 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불편한 선후배 관계를 확실하게 정리해준 이는 옆집에 살던 형이었다. 경기도 부천에 있는 신학교 학생이던 그의 논리는 간단했다.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고, 총을 들기 싫으면 국방의 의무가 없는 나라로 가든지…. 당신들이 말하는 지상천국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집단의 신도들을 25년 전 우연히 마주쳤다. 서울에 있는 모 병원에서였다. 난치병(근무력증)에 걸려 수술을 앞두고 있는 친구 여동생의 병실 앞에서였다. 친구 가족의 고민이 많았다. 완치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의사의 권유를 받아들여 다음 날 수술을 하기로 했다.

사달은 그날 저녁에 벌어졌다. 문병을 마치고 병실을 나오려는데 네댓 사람이 몰려왔다. 잠시 자리를 비켜 달라는 사이 무슨 말이 오갔는지 모르겠지만 좀 전까지 수술을 하겠다던 여동생의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나 수술하지 않을 거예요. 이유는 묻지 마세요.” 친구네 가족이 당황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담당 의사는 혀를 차며 확신에 찬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이 병은 난치병이라 백약이 무효입니다. 나이가 어리고 초기이니 지금 수술하면 나을 수도 있어요.”

그때 수술할 기회를 놓친 그 여동생은 25년 넘도록 병원을 다니며 약을 달고 사는 신세가 됐다. 천만다행인 것은 10여년 전 그 종교집단을 극적으로 빠져나왔다는 사실이다. 자기 오빠와 나를 자신이 믿는 집단으로 전도하지 못해 안달하던 여동생의 태도에 서서히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병이 나을 때까지 그 집단의 집회에 나가지 말고, 남자친구를 사귀어보면 어떻겠니?”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던진 내 제안에 여동생은 입술을 살짝 연 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을 잇지 못했다.

다음 날 그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왔다. 보물처럼 여기던 이단 신앙서적을 모조리 노끈으로 묶어 창고에 집어넣었다고 했다. 그리곤 전화번호를 여러 번 바꾸고 부천에서 의정부, 서울과 강릉 등으로 서너 차례 이사를 한 끝에 그 집단과의 끈질긴 악연을 끊을 수 있었다. 늦었지만 마흔 중반에 극적으로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 결혼까지 했다.

헌법재판소가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위한 대체복무제도를 마련하라고 결정해 교계 안팎에서 논란이 뜨겁다. 39년 전,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라고 그 집단을 간단히 정리해줬던 그 신학생 형과 엊그제 통화를 했다. 충북 청주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그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양심적 병역거부’가 아니라 병역면제자다. 종교적 병역기피자란 말이야. 그렇다면 군에 다녀온 사람은 ‘비양심적 병역이행자’란 말인가.” 반사회적인 종교집단에 청년들을 빼앗길 수 없다는 단호한 메시지였다.

동해안 바닷가 소읍에 사는 그 여동생은 서울의 병원에 올 때마다 고맙다며 안부를 묻는다.

“예전에 그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수술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윤중식 종교기획부장 yunj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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