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정치 시대] 유권자 등판… 일상이 ‘판’을 흔든다





정치 엘리트가 유권자의 삶 결정하던 시대 넘어
국민이 자신의 삶 계획하고 정치세력에 주입시키고 내세워
박근혜 前 대통령 탄핵 계기 구체적 삶의 문제 해결해 줄 정치세력에 표 몰아주는 경향


‘정치가 일상생활로 침투하는 시대’ ‘생활형 이슈가 정치지형을 결정하는 시대’….

최근 들어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 각국의 정치판이 요동치고 있다. 보수에서 진보, 진보에서 보수로의 수평적 정권이동을 뜻하는 게 아니다. 정치세력들의 목표와 정책, 지향점이 전통적 개념의 보수·진보 틀로는 정의(定義)할 수 없는 형태로 급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당들은 지지를 얻기 위해서라면 수십년, 수백년 고수해온 기존 정강정책을 내다버린 채 ‘환골탈태’조차 서슴지 않는다. 정당 스스로의 정체성마저 버리게 만드는 것은 바로 유권자들의 생활형 이슈다.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한 국가에서는 평등 이슈가, 청년실업과 일자리 문제가 극심한 나라에선 일자리 창출 정책이 집권세력을 결정하게 됐다. 기존 질서 유지와 경제 성장에 무게를 실었던 우파든, 사회적 평등과 복지정책에 ‘올인’해 온 좌파든 유권자의 일상생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면 완전 도태되는 세상이 도래했다는 것이다.

정치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을 ‘생활정치(Daily-life Politic)’의 전면 등장이라고 진단한다. 정치 엘리트가 유권자들의 삶을 결정하던 시대를 넘어 거꾸로 유권자의 생활이 정치를 바꾸는 시대로 진입했다는 뜻이다. 한 정치학자는 “현대의 정치는 20세기형 민주주의 개념을 변형시키고 있다”고 했다. 국민이 선거를 통해 정치인을 뽑아 의회를 구성하거나 집권자를 결정하는 게 대의민주주의라면 지금의 정치는 국민이 자신들의 생활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미리 계획했다가 이를 정치세력에 주입하고, 그런 정치세력을 내세워 생활이 구체적으로 개선될 때까지 감시하는 시대가 됐다는 것이다.

생활정치 시대는 우리나라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사태가 대표적이다. 민주적 절차로 뽑힌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적·행정적·법적 권한을 초월한 채 일탈행동을 벌이자 국민이 나서서 쫓아냈다는 의미에서만은 아니다.

이 시점을 계기로 우리 국민은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정치세력에 표를 몰아주는 시대가 열렸다는 것이다. 자유한국당으로 대표되는 보수정파의 몰락과 더불어민주당의 대약진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윤희웅 오피니언라이브 여론분석센터장은 “보수정당이 대(大)몰락한 것은 국민들의 실생활에서 발생하는 제반 문제를 해결할 아무런 대안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보수정당이 수십년 동안 안보라는 대표상품과 대기업 위주의 경제성장 정책에만 고립돼 경제적·사회적 양극화, 청년실업, 보편적 복지 필요성 등에 눈감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윤 센터장은 “과거의 신화에만 매몰돼 국민의 삶과 일상생활이 어떻게 개선될지에 대해 비전과 희망을 보여주지 못하자 유권자들은 철저하게 외면해 버렸다”고 분석했다. 이어 “문재인정부와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지지도 이전까지의 형태와는 달라졌다. 선거를 통해 표만 준 게 아니라 지지를 보낸 정치세력이 어떻게 자신들의 삶을 개선하는지, 공약했던 정책을 어떻게 실현하는지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생활정치의 시대가 장밋빛이기만 한 건 아니다. 유권자 대다수의 삶을 개선하는 방식이 긍정적인 형태로만 표출되지 않는다. 개별 국가와 시기에 따라 생활정치는 극단적 형태의 정권을 탄생시킬 개연성이 다분하다는 우려가 나온다.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워 집권한 도널트 트럼프 대통령이 국제 무역질서와 세계주의마저 버린 채 ‘관세전쟁’에 나서고, 자국 산업 보호를 주창하는 배경에는 끊임없이 자신을 감시하는 미국 내 지지층이 있어서다.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테러 공포와 난민 유입 문제가 대두된 유럽연합(EU) 국가들이 ‘사회적·종교적·정치적 관용’을 버린 채 반(反)이민, 자국이익 우선주의로 향해 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Key Word-생활정치

‘생활 속의 정치’ 혹은 ‘유권자들의 정치적 의식 향상에 따라 일상생활 속으로 정치가 침투하는 현상’을 지칭한다. 당선된 정치 엘리트가 정치·경제·사회 전반의 제도를 결정하는 시대를 넘어 유권자 스스로 자신들의 생활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문제를 특정 정치세력을 통해 해결하려는 경향 전체를 뜻한다. 일부 정치학자들은 민주주의가 ‘대의민주주의’에서 ‘풀뿌리민주주의’로, 이제는 생활정치의 전면화 양상으로 변화·발전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부터 생활정치 용어가 본격 사용됐으며,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사태를 통해 전면화됐다고 평가된다.

신창호 기자 proco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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