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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수의 감성노트] 듣기의 힘, 해결책보다 감정을 들으려는 노력 그 자체


 
김병수 정신과 전문의


하루 종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타인의 생각을 듣고, 감정을 보려고 애쓰고,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발굴한다. 이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진단하고 약도 처방하지만, 일하는 시간의 대부분을 들으면서 쓴다. 하루 종일 앉아서 남의 이야기를 듣고 돈을 버니 ‘그것 참 편한 직업’이라며 쉬이 여길 수도 있겠지만, 이만큼 힘든 일도 없다. 내 일이라고 과장해서 표현하는 게 아니다.

귀로 듣는 이야기를 눈에 보이는 것처럼 머릿속에서 재구성하려면 온몸의 신경을 귀로 모아야 한다. 볼 수 없는 마음을 보려고 애쓰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 이면에 담긴 의미를 찾는 건 더 어렵다. 웬만한 육체노동보다 에너지 소모가 더 크다. “의미를 발굴한다”고 표현한 것도 땅을 파고 들어가 보석을 캐내는 일만큼 힘들기 때문이다. 더욱이 “힘들어요. 괴로워요. 우울해요. 절망적이에요”라는 감정적 호소가 담긴 이야기를 듣다가 주의를 잠깐이라도 놓치면 ‘허투루 듣는다’는 느낌이 전해져서 환자를 더 아프게 만들 수도 있어 바짝 긴장해야 한다.

대학병원 정신과에서 오랫동안 진료를 받다가 친구 소개로 나를 찾아온 여자 환자가 있었다. 공황장애를 앓고 있었는데, 최근 들어 처방약을 꾸준히 먹고 있는데도 증상이 악화되었다. 병원에서 불안하다고 하소연을 하면 주치의는 “당신이 마음을 내려놓지 않아서 그런 거다”라고 하니,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고 했다. 약만 조정해줄 뿐 짧은 진료 시간에 자기 이야기들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답답한 마음을 안고 찾아온 그녀는 그동안 풀어놓지 못했던 사연을 들려주었다. 암 수술하고 항암제까지 복용하는 중에도 해외를 오가며 유학 중인 아들의 뒷바라지를 했는데, 자신의 기대와는 어긋나는 아들을 지켜보며 좌절감과 상실감을 느꼈다고 했다. 한참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나는 그녀가 대학병원에서 받았던 것과 똑같은 약을 처방해 주었다.

일주일 후에 다시 찾아온 그녀는 “선생님이 처방해 주신 약이 효과가 좋았어요. 지난 일주일은 무척 편했어요. 남편도 제 표정이 밝아져서 좋데요”라고 했다. 처방을 바꾼 것도 아니고, 용량을 늘인 것도 아니라고 했더니 “실컷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어요. 그래서 효과가 있었나 봐요”라고 말했다.

도대체 잘 듣는다는 건 어떤 걸까? 듣기의 힘은 어떻게 발휘되는 걸까?

‘누군가 내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있다’라는 경험 자체가 치유로 이어진다. 진지하게 듣는 것만 잘해도 문제의 절반은 해결된 거나 마찬가지다. 상담 훈련을 할 때 내담자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 하거나 요약해서 되돌려 주는 연습을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앵무새처럼 따라 하기보다는 자기를 떠난 말이 메아리처럼 증폭되어 되돌아오는 것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면 듣기의 힘은 배가 된다. 말한 이의 감정을 헤아리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확인해주면 된다. 내담자가 “그동안 애쓰며 살아왔던 내 인생이 무의미하게 느껴져요”라고 했을 때 상담자가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라고 바로 되묻거나 “그런 마음 갖지 마세요”라고 쉽게 위로하기보다 “당신의 노력이 헛수고가 될까 봐 불안한 거군요”라고 응답해주는 것이다. 친구 간에, 부부 사이의 대화도 마찬가지. 섣부른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는 상대의 감정을 들으려고 노력하는 자세, 그 자체가 중요하다.

인간이 겪는 불행을 말로 정확히 설명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보편화할 수 없는 개인의 은밀한 사연들은 언어를 거부하는 속성이 있다. 이것이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을 더 아프게 만든다. 이런 사람들에게 “네가 겪은 일을 정확히 말해 봐라. 도대체 네가 힘든 게 무엇 때문이냐”고 다그치면 상처는 덧난다. 말 하나하나를 꼬투리 잡고, 일일이 반응하려 들면 제대로 들을 수 없다. 듣는 이가 비록 완전히 이해할 수 없더라도 바로바로 따져 묻지 말고 가만히 듣는 것이 먼저다.

‘당신의 마음을 듣고 싶어요’라는 바람을 간직한 채 침묵하며 기다리는 일. 표현되기 어려운 진심이 드러나도록 시간을 내어주며 묵묵히 기다리기. 듣기의 힘은 기다림 속에서 발휘되는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듣기 위해 기다라는 이가 존재한다는 확신을 품고 사는 사람은 그 어떤 고난이 찾아오더라도 어떻게든 견디고 버텨낸다. 그러니, 듣기는 사람의 인생을 지탱하는 힘을 갖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병수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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