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완과 떠나는 성지순례 ‘한국의 산티아고 길’ 680㎞를 걷다] ⑩ 화성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

경기도 화성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에 설치된 스코필드 선교사 동상(왼쪽)과 순국기념비. 화성=강민석 선임기자
 
기념관 내부를 촬영하는 오기완 충북대 부총장. 화성=강민석 선임기자
 
순국기념관 전경. 화성=강민석 선임기자



 
오기완 충북대 부총장


공주제일교회를 나와 하천 길을 걸었다. 산책로가 잘 조성돼 있는 데다 곳곳에 쉴 수 있는 시설이 있어 기분 좋게 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산책로가 끝나는 곳부턴 쓰레기가 많았다. 하천을 따라 걸을 때마다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농촌 지역은 쓰레기 수거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고생스러운 순례길 힘이 된 선교사 이야기

건장한 청년이 도로 반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나처럼 배낭을 메고 다니는 것을 보니 국토순례를 하고 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K대 체육과를 졸업했는데 취업이 안 돼 시간이 있을 때 도전하는 것이라 했다. 2개월이 걸린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

‘한국의 산티아고 길’을 시작하고 6일째 걷는 날 한 식당 아주머니가 자신의 아들이 1개월간 자전거로 전국일주를 하더니 달라졌다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청년 시절 그런 경험은 토플 성적이나 그 어떤 자격증보다 값진 ‘스펙’이라고 생각한다.

인도가 없는 터널은 매우 위험했다. 그런 경우 터널 앞에서 기다렸다가 지나가는 차를 붙잡고 터널구간만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자동차 전용도로는 최대한 피하고 한적한 농로를 따라 걸었다. 무섭게 질주하는 차량 때문에 모래바람을 뒤집어쓴 적도 있다. 저녁을 먹으러 읍내 식당에 나갔다가 다시 숙소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고생스러울 때마다 후회도 밀려왔다. ‘기왕 걸으려면 외국의 아름다운 길을 걸을 것을….’

혼자 길을 걸었으나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현장에서 구한말 한국에 온 많은 선교사들을 만났고, 그들의 숭고한 삶은 내게 많은 용기를 주었다. 그들이 남긴 위대한 이야기를 가슴속에 새롭게 품게 됐다.

독립운동 이유로 일제에 희생된 29명

충남 아산과 경기도 안성을 거쳐 화성 향남읍에 도착했다. 경기도는 유난히 차가 많을뿐더러 여러 곳에서 도로확장 공사를 하고 있어 순례길이 불편했다. 주로 논둑길을 택했다. 드디어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 표지판이 보였다.

2001년 설립된 기념관은 화성시가 운영하는 공립박물관이다. 화성문화원 소속 5명의 직원이 근무 중이다. 이곳은 1919년 4월 15일 제암리 주민들을 교회에 가두고 불을 지른, 제암리 학살사건을 알리는 공간이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1919년 3·1운동 때 이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월 31일 발안 장날 장터에 모인 주민들은 국권 회복을 위한 시위를 전개했다. 이때 시위 군중 3명이 사망했다. 흥분한 군중은 일본인 가옥에 돌을 던지고 일본인 소학교에 불을 질렀다. 인근 주민들은 시위를 벌였고 4월 3일에는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일본인 순사를 살해했다. 일본군은 검거반을 조직하고 주동자 체포에 나섰으며, 독립운동의 핵심이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이라고 확신했다.

마을에 들이닥친 일본군은 4월 15일 성인 남성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에게 전달할 말이 있으니 교회에 모두 모이라고 명령했다. 교회에 모인 23명의 남성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걱정하면서 명령에 따라 앉아 있었다. 군인은 곧바로 출입문과 창문을 모두 잠그고 사격을 가했다. 그리고 교회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일제는 살려달라며 교회 밖으로 뛰어나온 이들을 향해 총을 쏘거나 총검으로 찔러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교회에 불려간 남편을 찾아 2명의 부인이 군인들의 포위를 뚫고 교회로 가려 했지만 모두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19세의 젊은 부인은 총검에 찔려 죽었고 40대 여성은 총에 맞았다. 두 사람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일제는 그것도 모자라 주변 마을로 들어가 30여채 가옥에 불을 지르고 사람을 죽였다. 이 일로 29명이 숨졌다.

일제의 학살 현장 세계에 알린 선교사

야만과 잔혹의 학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선교사가 있었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석호필·1889∼1970) 선교사다. 그는 제암리 학살 소식을 듣고 열차를 타고 수원역에 내려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화성 제암리까지 자전거를 타고 달려왔다. 참혹한 현장을 목격한 그는 시신을 모아 향남면 공동묘지 입구에 안장했다. 그리고 일본 헌병 몰래 현장 사진을 찍어 ‘제암리 학살 보고서’를 작성해 캐나다 선교부로 보냈다.

일제의 야만 행위는 장로교 기관지인 ‘장로교 증인(Presbyterian witness)’에 실려 국제사회에 알려졌다. 일제의 다양한 만행이 국제사회에 알려지자 당시 일제 식민통치에 우호적이던 해외 언론은 등을 돌리게 됐다. 세계 비난 여론에 직면한 일제는 기만적 문화통치로 선회한다.

스코필드는 1920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됐다. 본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일제 만행과 한국의 독립운동을 미국과 세계에 알렸다. 그는 1958년 칠순의 나이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대 연세대 중앙대 등에서 교수로 후학을 양성했다.

그는 외국인 최초로 대한민국 문화장과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70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데, 유언은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 달라”는 것이었다 한다. 그는 국립서울현충원의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된 유일한 외국인이다.

후대가 기억해야 할 제암리 학살 현장

1982년 문화공보부는 제암리 사건의 희생자에 대한 합동장례식을 치르고 희생자들을 순국열사로 추서했다. 이 지역은 사적 제299호로 지정됐다. 기념관 옆에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제암교회가 있다. 1969년 일본 기독교계와 양심적 단체가 방문해 사죄하고 모금한 비용으로 제암리교회를 건축했으며, 2001년 재건축했다. 말씀이 선포되는 강단엔 태극기가 세워져 있다.

제암리는 거룩한 민족저항 운동과 수난의 현장이다. 99년 전 불타는 예배당 안에서 한 덩어리로 뒤엉켜 최후의 순간을 맞았던 신앙인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종파와 계급을 초월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분연히 일어난 제암리 성도와 주민들은 한날 한자리에서 희생됐다. 그리고 파란 눈의 선교사는 일제의 위협을 무릅쓰고 그것을 세계에 알렸다. 그날 희생자들이 보여준 민족의식과 단합 정신, 인간애를 이어받아 대한민국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을 오게 하는 게 오늘을 살고 있는 크리스천의 시대정신 아닐까.

숙소로 가는 길은 바람이 불고 쌀쌀했다. 해는 이미 지고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진정한 평화는 반성과 사과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이 가슴 깊이 새겨진 하루였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그래픽=이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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