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완과 떠나는 성지순례 ‘한국의 산티아고 길’ 680㎞를 걷다] ② 순천 기독교와 린튼家

휴 린튼 선교사와 아내 로이스 린튼 사모가 1965년 건립한 전남 순천 조례동의 순천기독결핵요양원. 결핵치료 전문 요양병동으로 1인 병실 24개가 구비돼 있다. 순천=강민석 선임기자
 
휴 린튼 선교사의 묘비에 대해 설명하는 오기완 충북대 부총장. 순천=강민석 선임기자





 
오기완 부총장


애양병원은 전남 여수공항 끝자락에 있다. 공항 담벼락을 끼고 빠져나오는 좁은 길은 인도가 없다보니 걷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하루 도보거리는 최대 30㎞로 정했다. 순례길은 스마트폰에 저장된 지도를 보면서 걸었다. 햇빛이 액정에 반사되면 잘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았다. 번번이 길을 잃었는데, 인도가 없는 자동차 전용도로가 나오면 돌아가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아름다운 남해의 한적한 농촌마을을 걷는 건 무척이나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전라선 간이역인 구 율촌역을 지나 시골길과 차도를 따라 걸었다. 23㎞를 걸어 하루 만에 순천에 도착했다.

한국선교 두 명문가, 언더우드·린튼家

순천의 복음화율은 34.3%로 전국에서 가장 높다. 1892년부터 1986년까지 미국 남장로교가 한국으로 파송한 선교사는 450명인데, 이 가운데 순천지역에 온 선교사는 79명이다.

순천에는 1913년 순천선교부가 개설되면서부터 선교사 파송이 시작됐다. 아마 선교사들에게 ‘순천’(順天·하늘의 뜻을 따르다)이라는 지명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순천선교부는 매산학교 매산여학교 알렉산더병원을 설립했다. 이들은 고흥·여수 도서지역까지 나룻배를 타고 파도와 싸우며 복음을 전했다.

한국에 온 선교사 가문 중 두 명문가를 꼽으라면 단연 언더우드가와 유진 벨-린튼가다. 언더우드는 미국 북장로교가 파송한 선교사였고 린튼은 남장로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다. 두 가문의 공통점은 100년 넘도록 4대째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윌리엄 린튼(1891∼1960, 한국명 인돈)은 1912년 미국 조지아 공대를 수석 졸업했다. 그는 당시 제너럴 일렉트릭(GE) 입사를 마다하고 21세에 미국남장로교 최연소 선교사로 조선에 파송됐다. 그는 유진 벨(1868∼1925, 배유지) 선교사의 딸 살럿 벨(1899∼1974)과 결혼한 뒤 교육선교사로 전주·이리·군산 등지에서 활동했다.

린튼은 군산 영명학교에서 성경과 영어를 가르쳤고 전주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1956년 대전대학(현 한남대학교)을 설립하고 초대 학장이 되는 등 교육선교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외국인이면서도 1919년 군산의 만세시위 운동을 지도했다. 3·1운동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리며 지지를 호소하는 등 항일 독립운동 지원에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전주신흥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때 일제의 신사참배 거부에 앞장섰는데, 이 일로 학교가 폐교됐다.

그는 1940년 일제에 의해 추방됐다가 광복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전북지방의 선교에 힘썼고, 전주신흥학교 교장으로서 학교 정상화에 노력했다. 한국전쟁 와중에 전주에 남아 성경학교를 운영했다. 전쟁 막바지에는 부산에서 피난민 구호활동 등 선교를 계속하면서 한국 땅을 지켰다.

교육·의료 선교로 아버지 정신 대 이어

린튼 선교사는 말년에 암 투병을 하면서도 대전대학 설립에 매진했다. 그는 1960년 8월 미국으로 건너가 치료받던 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린튼 선교사의 한국사랑은 가족과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이어졌다. 그는 아들 4명을 뒀는데, 한국인과 함께 교육을 받게 했다. 셋째 아들 휴 린튼(1926∼1984, 인휴)과 넷째 아들 드와이트 린튼(1927∼2010, 인도아, 호남신대 전 학장)은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호남지역 교육과 의료선교 활동에 전념했다.

군산에서 태어난 휴 린튼은 14세에 한국을 떠나 미국 엘킨스대학과 콜럼비아신학교를 졸업했다. 해군장교로 6·25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에도 참전했다. 1954년 부인 로이스 린튼(1927∼)과 함께 순천에서 사역을 시작했으며, 등대선교회를 설립하고 도서산간 벽지에 많은 교회를 설립했다. 그는 서울에 갈 때도 고무신을 신고 3등 열차를 타고 다닐 정도로 검소했다고 한다. 휴 린튼은 애양원에서 선교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1984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순천 조례동 순천기독결핵요양원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디모데후서 2장 11∼13절 말씀이 새겨져 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살 것이요 우리가 참고 견디면 그와 함께 왕 노릇 할 것입니다.”

이국땅에서 복음을 전하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삶을 마감했던 선교사와 대를 이어 선교사역에 나선 후손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의 아내 로이스 린튼은 순천기독결핵재활원장으로서 30년 이상 결핵퇴치 사업에 기여했다. 그 공로로 국민훈장과 호암상을 받았다. 1989년 유지재단을 설립한 재활원은 순천 매곡동 순천기독진료소와 순천기독결핵요양원, 보호요양원을 운영하고 있다.

4대째 이어진 선교 열정에 감동

휴 린튼의 자녀 6남매 중 스테판 린튼(1950∼, 인세반), 제임스 린튼(1955∼, 인야곱), 존 린튼(1959∼, 인요한)은 한국에서 일하면서 4대 선교사가 됐다.

스테판 린튼은 1895년 할머니의 부친인 유진 벨 선교사가 조선 땅을 밟은 지 100주년을 기념해 1994년 유진 벨 재단을 설립해 북한 의료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다. 모두 400억원이 넘는 의약품과 의료장비를 북한에 지원했다. 그는 1997년부터 수십 차례 북한을 방문한 구호 전문가로서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북한을 지원하고 있다.

또한 막내 존 린튼은 한국에서 태어나서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현재 세브란스 병원 외국인진료센터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존 린튼 소장은 아버지 죽음을 계기로 1993년 한국형 구급차를 개발해 119응급구조체계의 기초를 닦았다. 또 유진 벨 재단 이사장인 형 스테판 린튼과 함께 2005년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기도 했다. “전라도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란 토종 한국인이니 이곳에서 뼈를 묻을 것”이라는 이들 후손의 고백은 저절로 고개를 숙여지게 했다.

순천기독결핵요양원 사택에는 휴 린튼의 장남인 데이비드 린튼(69) 목사가 2016년부터 거주하고 있다. 순례길 방문 때 그는 유창한 한국말로 반갑게 맞아줬다. 이런 인연으로 지난해 6월 충북 청주 충북대에서 열린 제32회 전국기독교수선교대회에 주강사로 초청했다. 그는 강단에서 아버지와 형제들의 헌신적인 한국 선교 활동을 소개했다.

린튼가가 개척한 교회는 순천을 중심으로 600여개에 이른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는 말씀이 생생하게 다가온 여정이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사진=강민석 선임기자, 그래픽=이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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