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 배우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13>] 기도는 일상서 하나님과 소통하는 그리스도인의 특권

많은 예술가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작품의 소재로 삼곤 했다. 일본 화가 구로다 세이키가 파리 유학 시절인 1889년 그린 작품 ‘기도’. 도쿄 예술대학 대학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위키피디아
 
독일 바이마르에 위치한 프리드리히 실러 박물관. 박양규 목사 제공
 
독일 본에 있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생가. 박양규 목사 제공
 
실러가 직접 쓴 ‘환희의 송가’ 원고. 박양규 목사 제공
 
박양규 목사


제116문 : 그리스도인은 왜 기도해야 합니까?

: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감사의 삶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성령을 주시되, 끊임없이 진심 어린 마음으로 갈망하며 그런 은사를 구하고 그로 인해 감사하는 자에게만 주십니다.

제117문 :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며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기도는 어떤 것입니까?

: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겸손한 마음으로 확신 속에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제120문 : 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도록 명하셨습니까?

: 우리가 기도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구할 때, 이 세상의 아버지보다 훨씬 더 잘 들어주시는 분입니다.

기도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

예수께서 활동하던 당시 유대 사회는 구약 시대와 달리 사뭇 복잡했다. 알렉산더 이후 3세기 동안 문화와 사상은 그리스 철학이 지배했고, 로마식 정치 체제가 들어섰다. 또 페르시아의 방언인 아람어를 사용했다. 그런 복잡한 시대 상황에서 구심점은 히브리 율법이었다. 마태복음 6장에 나온 예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비로소 이해된다. 다신(多神) 사회에서 다양한 신을 섬기던 로마 사람들은 필요한 것이 생기면 해당 신전을 찾아가 신에게 기도했다. 신전 밖에서 어떻게 살았느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해당 신에게 마땅한 종교적 제의로서의 기도만 하면 됐다. 신전을 나오면 신과 무관하게 살아갔다.

예수께서도 그런 현실을 아시고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하지 말라(마 6:7)”고 가르치셨다. 중언부언(重言復言)은 반복된 말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그리스 신전에서 행해지던 전형적인 기도였다. 풍요의 여신 아르테미스에게 풍요를 간구하며 두 시간 동안 아르테미스를 불렀던 에베소 사람들의 기도였다(행 19:34). 한걸음 더 나아가 갈멜산에서 폭풍우(暴風雨)의 신 바알을 하루 종일 부르던 광란의 기도도 그렇다(왕상 18:25∼26). 예수께서는 그들의 기도 동기가 먹고 마시는 생계의 목적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셨다(마 6:31).

그러나 예수께서 강조한 기도는 그리스 종교처럼 일상과 무관하게 신전(神殿) 내부에 국한된 종교제의가 아니라 신 앞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신전(神前)’ 의식이었다(마 6:6). 이것이 ‘기도’라는 뜻의 히브리어 ‘테필라’가 갖는 원어적 의미이다. 바울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했던 것도 이런 의미에서였다. 또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코람데오(Coramdeo)’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신의 눈앞에 있다고 인식할 때, 비로소 내일의 불확실함을 극복할 수 있다(마 6:34).

주기도문과 우리들의 기도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主祈禱文)도 마태복음 6장에 나온다. ‘주기도문’에서 ‘기도(Coramdeo)’가 사라지면 ‘주문’으로 전락한다. 주기도문의 첫 문장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지칭한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120문은 그리스 신들에게 소원을 빌고, 종교적 제의를 행하는 ‘계약관계’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로 기도할 때 참된 기도가 된다고 말한다. 이 관계에서 비롯된 일상의 삶이 ‘합당한 기도’이다. 그것이 전제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응답을 얻을 수 있다(제117문).

그러므로 기도는 고행(苦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 속에서 하나님과 소통하기 때문이다(제116문). 이것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나라’다. 종교적 제의로서의 기도는 멈출 수 있지만 코람데오의 의식(意識)은 결코 멈출 수도, 멈춰서도 안 되는 영적인 호흡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기도는 어떠한가. 한국교회의 기도는 종교적 제의에 가깝다. 마치 신전 안에서 신을 대면하듯 교회당에서 기도 ‘행위’에 전념한다. 에베소 사람처럼 그 행위가 두 시간 지속되면 모범적인 기도생활로 여겨진다. 갈멜산의 광적인 바알 선지자들처럼 기도하면 그것이 ‘믿음의 척도’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누군가는 이런 비유가 과하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교회 문밖으로 나서는 순간 코람데오를 망각한다면, 이 비유가 적절할지도 모른다.

베토벤과 실러, 그리고 환희의 송가

중세 유럽은 교회가 지배했지만 암흑의 시대였다. 근대에는 수없는 전쟁과 피 흘림이 있었다. 국가마다 사회 부조리와 불평등한 모순이 있었다. 교회와 성당의 첨탑은 하늘에 닿았지만 첨탑 밖 삶의 현장에선 착취와 억압이 팽배했다. 자유와 평등을 표방하던 1789년 프랑스혁명은 귀족의 거센 반대를 맞닥뜨려야 했고, 뒤를 이은 나폴레옹 전쟁은 유럽의 이상과 현실이 얼마나 괴리감이 있는지를 보여줬다.

이 시대 활동했던 작가가 ‘빌헬름 텔’의 저자 프리드리히 실러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폭군을 처단한 빌헬름 텔의 영웅담으로 인식하지만 실러는 다른 메시지를 던진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프랑스혁명은 급진적인 변화를 위해 많은 피를 흘린 것을 정당화했지만 실러는 이에 반기를 들었다. 실러가 생각한 이상은 폭력을 통한 혁명적 변화가 아니라 정당한 방법을 통한 사회의식의 변화였다.

‘빌헬름 텔’에서 우리가 주목해볼 만한 실러의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작품 속에서 레딩은 “동지들! 칼로 맞서기 전에 우선 우리의 탄원을 왕에게 들려줍시다. 정의를 위해 쓰일 때도 폭력은 끔찍한 것입니다. 신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을 때에만 도와주십니다”라고 말한다. 발터 퓌르스트도 이같이 동조한다. “불가피한 일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이상은 안 됩니다. 태수와 그 하수인을 쫓아내고, 견고한 성을 공격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가능하면 피를 흘리지 않도록 합시다. 칼을 쥐고도 절제할 줄 아는 민족은 두려워해야 마땅한 존재니까요.”

이처럼 실러가 추구하는 사회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존중하고 정의를 지키는 사회였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만들어가야 할 이상적인 사회다. 예수께서 강조하신 기도의 지향점은 개인적 성공과 성취가 아니라 공동체의 정의와 화합이다. 실러는 세상을 떠나기 전 그 이상을 다음과 같이 구체화했다.

가혹한 현실이 갈라놓았던 이들을

신비로운 그대의 힘으로 다시 결합시키는도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노라.

그대의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르는 곳에

백만 인이여, 서로 포옹하라!

전 세계의 입맞춤을 받으라!

형제여! 별의 저편에는 사랑하는 아버지가 계신다.

억만의 사람들이여, 엎드려 빌겠는가?

세계의 만민이여, 창조주가 계심을 알겠는가?

별들이 수놓아져 있는 천공의 저편에서 사랑하는 주님을 찾으라.


실러의 이 가사에 베토벤이 곡조를 붙인 것이 바로 ‘환희의 송가’다. 청력을 잃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창조주의 면전(面前)에서 인류의 화합과 존엄성을 노래하고자 했던 베토벤의 마지막 숨결이며, 실러의 유언이다. 창조주를 기억하며 인간의 존엄성이 포옹하는 사회야말로 새벽마다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만들어가야 할 하나님 나라의 ‘환희의 송가’가 아닐까.

▶ 나눔과 적용을 위해 생각해 볼 것은?

☞ 나의 기도는 어떤 문제가 있나요?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요?

☞ 한국교회는 기도의 힘으로 이만큼 부흥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교회의 기도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글=박양규 목사

△서울 삼일교회 교육디렉터 △청소년을 위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1·2 저자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