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 배우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11>] 주일성수는 삶 속에서 ‘참된 안식’을 만들어 가는 것

독일 바이마르 국민극장 앞에 세워진 괴테와 실러의 동상. 바이마르는 괴테와 실러가 작품활동을 했던 도시다. 박양규 목사 제공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왼쪽)와 프리드리히 실러.국민일보DB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괴테 생가 내부의 괴테 서재. 박양규 목사 제공
 
박양규 목사


제103문: 제4계명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첫째, 복음의 사역과 신앙교육을 지속하면서 특별히 안식의 날에 성실하게 교회에 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례에 참여하며 공적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헌금을 드려야 합니다.

둘째, 내가 살아가는 모든 날 동안 악한 일에서 떠나 쉬고,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내 안에서 일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영원한 안식이 지금 나의 삶 속에서 시작됩니다.

한 세대 전과 비교해 달라진 십계명의 조항이 있다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제4계명일 것이다.

한국교회 대다수 성도들은 주일(Sunday)을 안식일(Sabbath)로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아왔다. 대표적으로 주일에 일하지 말고, 공부하지 말고, 돈도 쓰지 말고 ‘성수(聖守)’하라는 가르침이다. 성도들은 주일엔 차비를 쓰는 대신 먼 거리를 걸었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주일에 공부하지 않는 것이 믿음의 척도였다. 입사 시험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결단’을 종용하는 간증들이 이어졌다. 주일을 성수했더니 사업이 번창하고,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갔다는 내용 등이다. 만일 지금 그런 설교를 하면 성도들의 반응은 어떨지 궁금하다.

그렇다면 십계명 중 4계명이 요구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 4계명에서 강조하는 것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안식의 날에 말씀 읽기, 성례 참여와 같은 ‘종교적 행위’를 하는 것이며 두 번째로 그런 행위를 통해 참된 ‘안식’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다. 종교적 행위는 참된 안식을 위한 수단이다. 그 자체가 목적이 될 경우 교조주의에 빠지게 되고, 예수께서 종교지도자들과 갈등을 일으켰던 원인이었다.

그렇다면 십계명에서 말하는 안식일의 의미는 무엇일까. 창조주의 ‘안식’을 기념하고(출20:11), 구원자가 베푸는 구원의 ‘안식’을 기억하라(신5:15)는 것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안식일의 핵심이 아니라 행위를 통한 본질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의 타락 이전, 창조 상태의 안식을 기억하면서 그 ‘안식’을 우리의 삶 속에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103문을 차근차근 들여다보면 안식일에 성례를 지키는 종교적 행위는 본질을 기억하기 위함이며, 우리는 계명을 통해 안식의 그림자들을 실현해 간다. 부모를 공경하고(5계명), 살인하지 말고(6계명), 간음하지 말라(7계명)는 계명을 지키면서 구체화시켜 나간다.

이를 위해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해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했다. 고조선 8조법이나 함무라비 법전에도 나와 있듯이 인류는 예나 지금이나 살인과 같은 범죄를 반복한다. 예수께서 말하는 핵심은 세상이 썩는 것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않도록 안식을 비추어 나가는 사명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다는 점이다.

독일과 질풍노도 문학

독일은 종교개혁을 일으켰고, 개신교가 주류인 나라다. 18세기 독일은 종교개혁의 흔적이 ‘교회’라는 형태로 사회 곳곳에 남아 있었지만 참된 ‘안식’의 흔적은 사라졌다. 그래서 18세기 중반에 등장한 것이 ‘질풍노도 문학(Sturm und Drang)’이다. 이는 계몽주의와 기독교 가치관에 대항해 개인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문학을 일컫는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나 프리드리히 실러의 ‘도적 떼’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괴테와 실러의 작품은 젊은이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고, ‘베르테르 신드롬’을 일으켰을 정도다.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친 이유는 기존의 계몽사상과 개신교의 윤리의식이 더 이상 사회적 구속력을 갖지 못하고 관념화됐기 때문이다. 참된 안식을 제공해야 할 교회의 가르침은 관념이 되고 문화가 되었을 뿐 사회의 기준이 되지 못했다. 그런 사회를 뛰쳐나와 스스로 도적 떼가 된 카를이라는 인물은 ‘도적 떼’에서 이같이 말한다.

“성직자들은 잘못된 내용을 설교하고, 대학교수들은 사회 속에서 작은 영향력조차 없으면서 강의로 허세를 부리고 있다. 국가의 탐심으로 전쟁터로 내몰린 젊은이가 흘린 피의 대가는 잡상인의 물건을 포장하는 가십거리 신문지로 사용되거나 아니면 비극 작가에 의해 허황되게 부풀려져 이용만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자기보다 권력이 높은 사람들 앞에서라면 구두닦이에게도 굽신거리면서, 가난하고 위험하지 않은 사람들을 마음껏 짓밟고 있지 않은가. 자신들에게 밥 한 끼 먹여주면 우상처럼 떠받들면서, 경매에 붙인 깃털 이불 하나 때문에 서로 살인하려고 으르렁거린다. 위선적인 사두개인들을 욕하면서 자신들은 제단 앞에서 이자를 따지고 있다!”(‘도적 떼’(열린책들) 31∼32쪽)

‘빌헬름 텔’의 저자이기도 한 실러가 비판한 대상의 중심에 교회가 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는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했다. 7계명이 위협받았다. 사회의 절대적 가치관을 대변하는 인물, 알베르트는 베르테르에게 충고한다. 그러나 알베르트를 향한 베르테르는 이런 대화를 남겼다.

“‘오, 똑똑하기 그지없는 당신들!’ 나는 미소를 흘리며 소리쳤네. ‘열정! 도취! 광기!’ 당신들은 그렇게 차분하게 서 있지요. 그렇게 거리를 두고서 말입니다. 당신들 도덕군자들은 술주정뱅이를 욕하고 미친 사람을 경멸하지요. 그 곁을 마치 사제처럼 지나치며 바리새인처럼 하나님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그들 중의 하나처럼 만들어주지 않은 데 대해서 말이죠.”(‘젊은 베르테르의 슬픔’(펭귄클래식) 82∼84쪽)

질풍노도 사회에서의 십계명

어쩌면 질풍노도 문학이 탄생한 18세기 독일처럼 우리 사회도 질풍노도의 한가운데에 있다. 교회는 사회 속에서 윤리의 표준을 외치지만 갈대가 되어 휘청이고 있다. 로마 시대나 감리교가 확산되던 시기에 교회가 사회의 양심이 되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현재 교회가 외치는 십계명은 사회 속에서 이미 설득력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십계명 자체를 지키려는 교조주의가 아니라 십계명을 통해 실현하려는 안식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는, 그 본질을 상실한 것이 아닐까. 교회는 타 종교의 ‘우상’과 동성애의 ‘일탈’에 대해서는 유독 엄격하면서 내면의 ‘우상’과 성직자들의 미움, 탐욕, 음란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세상이 교회에 바라는 것은 동성애에 대한 정죄를 중지하라는 것이 아니라 엄밀히 말해 교회가 양심의 기준이 되라는 단순한 요구다. 교회가 십계명을 통해 ‘안식’을 전하지 못하면 ‘탄식’이 되어 되돌아올 뿐이다.

▶ 나눔과 적용을 위해 생각해 볼 것은?

☞ 어떻게 하면 우리의 일상 속에서 참된 안식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 교회의 십계명이 우리 사회의 윤리적 기준이 될 수 있도록 한국교회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요?

글=박양규 목사

△서울 삼일교회 교육디렉터 △청소년을 위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1·2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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