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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정근 (3) 결핵 덕에 생긴 별명 ‘빼빼’… 마른 몸 감추려 옷 껴입어
정근 원장이 초등학교 6학년이던 1971년 집 앞 마당에서 아버지와 찍은 사진.   '빼빼'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정 원장의 중·고등학생 시절 사진은 화재로 모두 타 유일하게 남은 건 고교 동창이 건네준 졸업앨범 사진 뿐이다. 1975년 진주 지역에서 명문고로 알아주는 진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내 인생은 찬란하지 않았다. 오히려 살면서 첫 번째 시련을 지나고 있었다. 폐결핵이었다. 중학교 1학년의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병이었다. 잘 먹지 못하던 시절이었던 데다 어릴 때부터 원체 마른 체구였다. 중학생 때 결핵은 물론 영양...
입력:2023-02-13 03:10:02
[역경의 열매] 정근 (2) 늘 배 곯았던 어린 시절… 옥수수 죽 먹으려 일찍 입학
정근(오른쪽) 원장이 초등학교 4학년 시절이던 1969년 경남 진주 상봉서동 집 마루에서 형제들과 찍은 사진. 지금도 나는 사람들에게 내 소개를 이렇게 한다. ‘지리산 속 산청 삼장 촌사람’이라고.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인다. ‘예수 믿고 봉사로 바뀐 사람’이라는 말이다. 소개한 그대로 나는 웅장한 산세를 자랑하는 지리산을 뒷산이라 말하는 경남 산청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봄에는 각종 약초와 산나물이 지천에 깔렸다. 여름이면 울창한 숲이 그늘을 만들고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가 더위를 가져갔다. 가을과 겨울엔 곱게 물든 ...
입력:2023-02-10 03:05:01
[역경의 열매] 정근 (1) “한국교회와 기독교인이 ‘세상의 빛과 소금’ 돼야”
온병원그룹 정근 원장이 지난 4일 부산 부산진구에 있는 온종합병원에서 진행한 ‘한국건강대학 46기 졸업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대화는 ‘2000여년 전 강도 만난 자가 있다. 강도 만난 자를 도운 사마리아인과 말로만 외치는 바리새인 중 누가 옳은가’라는 질문으로 시작됐다. 온병원그룹 정근(63) 원장이 ‘하면 된다’의 모토인 ‘행동하라’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대화는 지난 4일 부산 온종합병원에서 진행한 한국건강대학 특강 이후 가졌다. 건강대학은 온종합병원 전문의들이 노인들에게 건강을 지키는 ...
입력:2023-02-09 03:10:01
[역경의 열매] 김영걸 (16·끝) 위기 겪고 있는 한국교회, 정도·정직 목회로 이겨내야
포항동부교회 성도들이 2011년 경북 포항의 교회에서 진행된 새 성전 입당예배에서 김영걸(오른쪽 단상위) 목사의 메시지를 듣고 있다. 요즘 들어 사람들이 나에게 인복이 있다고 말하곤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나는 믿음의 부모님을 만나서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내 마음에 뿌리 깊게 내렸다. 지금도 눈을 감고 기도할 때면 어린 나를 위해 기도해주시던 할머니 안초순 전도사님과 아버지 김충효 목사님, 그리고 어머니의 기도가 가슴에 흐르는 것을 느낀다. 또 포항동부교회에서 좋은 성도들을 만났다. 부족한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
입력:2023-02-08 03:10:01
[역경의 열매] 김영걸 (15) 하나님 은혜와 성도들 기도로 세워진 포항동부교회
김영걸(나무 십자가 앞) 목사가 새 예배당 건축 중 공사 현장 옆에 임시로 마련한 기도처에서 교회 장로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 포항동부교회는 내 인생의 큰 자랑이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살전 2:19)라고 한 것처럼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자신 있게 포항동부교회라고 답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전건축의 길이 열렸다. 포항 입구에 5만㎡(약 1만5000평)의 산지를 얻게 되면서 모든 장로님과 성도들이 건축을 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내가 잘한 것이 있다면 급하게 추진하지 않...
입력:2023-02-07 03:10:02
[역경의 열매] 김영걸 (14) 포항동부교회 부임… 성전 건축의 길 열어주신 하나님
김영걸 목사 부임 초기 포항동부교회 성도들이 경북 포항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모든 성도를 수용하기 힘들 정도로 예배당이 좁아 김 목사는 교회 이전을 준비하게 됐다. 2003년 포항동부교회에 부임했던 때가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포항동부교회 성도들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고 전임 목사님은 교회의 바탕을 잘 세운 뒤 은퇴하셨다. 이것만 해도 나는 참 복 있는 목회자라는 생각이 든다. 성도들은 젊은 목사가 왔다고 좋아하고 들떠 있었다. 성도 가정을 심방하면서 성도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대각성 전도 운동도 열심히 진행해 많은 새 신자...
입력:2023-02-06 03:10:01
[역경의 열매] 김영걸 (13) 소망하던 담임목사로 부임… 할머니와 아버지의 길 이어
김영걸(왼쪽 세 번째) 목사가 2000년 연동교회를 떠나면서 서울 종로구 교회에서 이성희(왼쪽 두 번째) 목사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나는 연동교회에서 내 인생의 귀한 스승을 만났다. 바로 이성희 목사님이다. 당시 이성희 목사님은 ‘미래목회 미래사회’ ‘미래목회 대예언’이라는 책으로 한국교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연동교회는 역사가 오래된 교회이긴 하나 도심 공동화 현상으로 교회 인근에서 예배에 출석하는 분들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보니 교회의 생존전략을 새롭게 연구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하면 세상에 ...
입력:2023-02-03 03:10:01
[역경의 열매] 김영걸 (12) 숨 넘어갈 것 같은 아이 붙들고 “하나님 살려만 주세요”
김영걸(오른쪽) 목사가 휘경교회 부교역자 시절인 1989년 서울 중구 남대문교회에서 임은미 사모와 결혼식을 올리고 있다. 나는 20대 중반부터 30대 중반까지 10여년간 휘경교회에서 보냈다. 전통적인 교회였고 신실하고 좋은 분들이 모인 교회였다. 한정원 담임목사님은 자상하고 세심하게 교회 일을 돌보시던 분이었다. 그러면서 부교역자들과도 격의 없이 함께 어울리셨다. 목회 초년병인 나에게 목회의 기본을 가르쳐주신 한 목사님을 지금도 목회 스승으로 존경하고 있다. 휘경교회 부교역자로 섬길 때 교회가 부흥하면서 주일에 두 번 드리던 예배가 세 번으로 ...
입력:2023-02-02 03:05:01
[역경의 열매] 김영걸 (11) 목회 인생 출발지 휘경교회… 10년 섬긴 마음 속 고향
김영걸(왼쪽) 목사가 휘경교회 부목사 시절 임은미(오른쪽) 사모, 아들 윤찬이와 함께 서울 동대문구 신혼집 앞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신학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결정해야 할 때가 됐다. 처음에 나는 가난한 자의 이웃이 되셨던 예수님처럼 작고 어려운 교회를 섬겨야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 방향성을 기초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나의 삶을 어떻게 바쳐야 할지’ 고민을 거듭했다. 당시 젊은 신학도의 눈에 비친 한국교회는 교권주의와 물량주의에 깊이 빠져 회생할 수 없어 보였다. 한국교회와 내 미래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었다. 3...
입력:2023-02-01 03:05:01
[역경의 열매] 김영걸 (10) 교육전도사로 휘경교회 섬기며 ‘마음만은 담임목사’
김영걸 목사가 휘경교회 교육전도사 시절 서울 동대문구 교회에서 초등부 아이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다. 나는 신학대학원 입학이 확정된 후 서울 동대문구 위생병원 옆에 있는 휘경교회를 교육전도사로 섬기게 됐다. 초등학생 4~6학년을 맡았는데 당시 출석하는 아이들은 100여명 정도 됐다. 2년 동안 아이들을 열심히 섬기다 보니 나중에는 아이들이 150명 가까이 모였다. 교육전도사 1년 차일 때는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모든 것이 서툴렀다. 2년 차가 되자 뭔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2년 차 때 여름성경학교를 준비하면서 기도해 보니 초등학교 5~6학년에게는 여름...
입력:2023-01-31 03:10:01
[역경의 열매] 김영걸 (9) 세상과 단절한 채 장신대 신대원 목표로 입시 준비
김영걸(원 안) 목사가 장신대 신대원 시절 경기도 남양주 천마산 기도원에서 열린 사경회에 참석해 기도하고 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면 신학대학원에 도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미 대학교 4학년 때 졸업학점을 다 이수해 ‘서양철학사’나 ‘사회계층과 계급론’ 등 전공이 아닌 과목을 수강 신청해서 들었다. 신학의 기초가 되는 학문을 듣고 싶어서였다. 철학과나 사회학과 학생들이 수업에 들어오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기도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훗날 여성가족부 장관을 맡게 되는 장하진 사회학과 교수님께서 “이과대학 학생...
입력:2023-01-30 03:10:02
[역경의 열매] 김영걸 (8) “하나님 저는 어떤 길로 걸어가야 합니까”
김영걸 목사가 1992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 서울동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눈물을 닦고 있다. 목사 되기를 거부하던 김 목사는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 소명을 받았다. 아버지가 온양제일교회에서 사역하실 때 할머니는 가나안교회를 사임하시고 온양으로 오셨다. 당시 할머니는 위암 투병 중이셨다. 몸이 약해지셨는데도 늘 가정예배를 인도하시고 기도에 정진했다. 성도들은 할머니의 기도를 받으러 사택에 드나들었다. 할머니는 1978년 2월 하나님 품에 안기셨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다. 너무 슬펐고 할머니가 기도하신 대로 살지 못한 내가 너무 미웠...
입력:2023-01-27 03:10:01
[역경의 열매] 김영걸 (7) 청소년기 방황 거듭하며 ‘목사의 꿈’ 버리기로 결심
김영걸(왼쪽 두 번째) 목사가 1994년 가족들과 함께 할머니 안초순 전도사가 사역하던 경기도 광주 가나안교회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할머니는 김 목사가 목회자의 길을 가도록 늘 기도하셨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목사가 되라는 할머니 말씀을 듣고 자랐다. 그래서 가정예배를 드리거나 식사 전 기도할 때면 “하나님, 훌륭한 목사가 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했다. 이렇게 기도를 하지 않으면 할머니는 그때마다 다시 기도하도록 했다. 목사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가 입에 배는 바람에 교회에서 대표 기도할 때도 “훌륭한 목사가 되게 해달...
입력:2023-01-26 03:10:01
[역경의 열매] 김영걸 (6) 아버지 사역 따라 서울 전학… 성적 떨어지고 친구들 놀림감
김영걸 목사는 학창시절 방황할 때도 부모님의 기도 덕에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 김충효(왼쪽 세 번째) 목사가 집에서도 정장을 갖춰 입고 가정예배를 인도하는 모습. 왼쪽 두 번째가 김영걸 목사. 나는 1970년 서울로 전학을 갔다. 아버지가 서울 피어선성경학교 교무처장으로 근무하게 됐기 때문이다. 교회와 부모의 품 안에만 있던 나는 이때부터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 당시 아버지가 사역하던 덕수리교회 사임 절차가 늦어지면서 부모님은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 초 나와 누나를 서울 이모 집에 보냈다. 이모 집에서 4학년 1학기를 다니게 된 나를 이모...
입력:2023-01-25 03:15:01
[역경의 열매] 김영걸 (5) 나는 교회의 아들… 교회는 내 인생 출발점이자 바탕
김영걸(왼쪽 세 번째) 목사가 초등학교 3학년 때 경기도 양평 덕수리교회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가 6살 때 우리 가족은 경기도 광주를 떠나게 됐다. 가나안고아원 원목이던 아버지가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덕수리에 있는 덕수리교회에서 사역하게 되면서다. 할머니는 가나안교회에 남기로 했다. 덕수리로 이사하던 날이 생각난다. 당시 가나안고아원엔 지프차가 있었고 그 뒤에는 화물칸을 연결할 수 있는 장치가 있었다. 화물칸에 우리 가족의 짐을 모두 싣고 출발했다. 손수레보다 고작 2~3배 큰 화물칸에 모든 짐을 다 실을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단출...
입력:2023-01-20 03:10:01
[역경의 열매] 김영걸 (4) 가나안농군학교 섬기며 하나님 안에서 가족들 다시 모여
경기도 광주 가나안교회에서 사역한 김영걸 목사의 할머니 안초순 전도사(왼쪽)가 가나안농군학교를 세운 김용기 장로의 아내(오른쪽)와 함께 있는 모습. 할머니는 1962년 경기도 광주 가나안농군학교 안에 있는 가나안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그 후 아버지도 가나안고아원 원목으로 사역하게 되면서 우리 가족들은 다시 함께 모여 살게 됐다. 할머니는 새벽기도가 생활이셨고 낮에는 심방을 다니셨다. 할머니가 새벽에 기도하러 나가면 나도 같이 깰 때가 있었다. “할머니, 무서워. 오늘은 가지 마”라며 조르는 나를 데리고 할머니는 새벽기도를 가셨다. ...
입력:2023-01-19 03:10:01
[역경의 열매] 김영걸 (3) 쓰러진 손자 안고 눈물로 기도 “하나님 고쳐주세요”
김영걸 목사의 할머니 안초순 전도사(앞줄 오른쪽 세 번째)가 1977년 경기도 광주 가나안농군학교 안에 있는 가나안교회 장로 장립 예배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안 전도사 왼쪽은 가나안농군학교 대표 김용기 장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영양읍교회 사택에서 할머니와 함께 신혼 생활을 시작하셨다. 아버지는 두 달 정도 영양읍교회에 계시다가 근처 추파교회에 이어 진보교회 담임 전도사로 사역하셨다. 그리고 1960년 성서공회 직원으로 채용돼 서울로 가게 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같이 서울에 올라가지 않으시고 나보다 두 살 많은 누나와 함께 영양읍교회에...
입력:2023-01-18 03:05:01
[역경의 열매] 김영걸 (2) 월남 후 3년 만에 기적적으로 만난 아버지와 할머니
김영걸 목사의 할머니 안초순 전도사(두 번째 줄 오른쪽 다섯 번째)가 1950년 강원도 도계장로교회에서 성도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따로 남한에 내려온 할머니 안초순 전도사와 내 아버지가 만난 건 하나님의 은혜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할머니는 월남 후 강원도 도계장로교회에 계시면서 장날이면 노방전도를 하셨다고 한다. 특히 도계역 앞에 선 채 기차에서 내리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혼자 월남한 아버지는 서울로 가셨다. 곳곳을 돌아다니며 함경도에서 온 사람들을 찾아 이런저런 소식을 물어보다가 강원도 도계에도 함경도 출신들이 있다...
입력:2023-01-17 03:10:01
[역경의 열매] 김영걸 (1) 우리가족 믿음의 뿌리 할머니, 신앙의 자유 찾아 월남
경북 영양군 영양읍교회 성도들이 1963년 교회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앞줄 어린아이가 김영걸 목사, 김 목사 오른쪽과 왼쪽이 할머니 안 초순 전도사와 아버지 김충효 목사. 내가 태어난 곳은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서부리다. 정확히 말하면 영양읍교회 전도사 사택에서 태어났다. 영양은 지금도 군 자립도가 가장 낮은 곳 중 하나이니 1950~60년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산골 중의 산골이라 할 수 있었다. 당시 할머니는 영양읍교회 전도사였고, 아버지는 신학생이었다. 아버지가 사택에서 살고 계실 때 내가 태어났다. 그래서 우리 가족을 설명하려면 할머...
입력:2023-01-16 03:10:01
[역경의 열매] 최성권 (20·끝) 세상에 도움 주는 기업 돼 선교의 도구로 사용되길…
최성권 선교사가 지난해 7월 여의도 국민일보에서 ‘전기를 나눠요, 사랑을 나눠요’ 캠페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나와 제임스는 다시 힘을 합치기로 했다. 프랜차이즈로 나가자는 데 공감하면서 그다음 방향을 물었다. 그는 이미 그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미국 내 프랜차이즈를 연결해 주는 큰 규모의 회사가 3개 있는데 그중 우리 일에 가장 관심이 있는 회사로 결정하면 된다고 했다. 시카고에 있는 FMS라는 회사를 선택했다. 다른 두 개의 회사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다가왔다. 전 직원들에게 우리 제품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는데 “이 제품은 ...
입력:2023-01-13 03:10:01
[역경의 열매] 최성권 (19) “지역별 프랜차이즈로 제품 설치하자” 제안에 솔깃
최성권(앞 테이블 왼쪽) 선교사가 지난해 6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한 침례교단 모임에 참석해 이야기를 듣고 있다. 국민일보와 업무협약체결을 하고, 한 달이 지난 6월 담임 목사님이 미국을 방문하기로 했다. LA에서 열린 미주한인침례회총회에 그해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장이셨던 고명진 목사님을 수행해 임원 자격으로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각자 탑승한 항공편이 다르다 보니 착륙 시간도 2시간 차이가 났다. 애매했다. 그렇다고 먼저 오신 귀한 손님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내게 주어진 특별한 기회라 여기고 기쁘게 공항 마중을 나갔다. 그러자 다...
입력:2023-01-12 03:10:01
[역경의 열매] 최성권 (18)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동시에 멈추며 수출에도 차질
최성권(오른쪽) 이엔포스 대표가 지난해 5월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빌딩에서 변재운 국민일보 사장과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있다. 2년여 동안 미국을 왕래하며 내린 결론은 캘리포니아였다. 로스앤젤레스 오렌지카운티 부에노파크에서 미국 현지 회사의 간판을 붙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다. 2020년에 투자 이민 비자를 발급받아 미국에서의 활동이 한층 자유로워졌다. 신나게 스타트를 했는데 아니 이게 웬일인가. 코로나19의 역습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동시에 멈춰선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동이 끊기면서 수출에 차질이 생겼다. 점차 위기...
입력:2023-01-11 03:10:01
[역경의 열매] 최성권 (17) 국내 최고 선박기업 배에도 이엔포스 절전장치 탑재
최성권 선교사가 2018년 성지 순례차 방문한 이탈리아 로마에서 장덕봉 목사와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국가 조달기관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자마자 국내보다 중국의 움직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정부 차원에서 이엔포스의 제품을 설치하는 기업마다 대출 자금을 지원하는 형식으로 대대적인 보조를 해주게 된다는 소식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나는 중국 시장이 확대되면서 13억 중국민의 사랑을 받는 선교적 기업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어 이웃나라 일본 기업에서도 부쩍 관심이 커졌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지혜와 ...
입력:2023-01-10 03:05:01
[역경의 열매] 최성권 (16) 조달청 우수제품으로 등록… 정부와 공기업 문의 빗발쳐
최성권 선교사가 2016년 경기도 중소기업 포럼에서 전력개선 장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09년부터 시작된 민사소송은 7년간 이어졌다. 상고심까지 최종 승소로 마무리된 때는 2019년이었다. 법정 소송 중에도 유사 제품은 독버섯처럼 번져나갔다. 해외 바이어들 중에서 정품과 가짜인 짝퉁을 구별할 줄 모르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때는 속이 쓰렸다. 다시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러시아 철도 회사와 MOU(업무협약)를 맺으면서 업무를 시작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 고무적인 일이 됐다. 2012년도에 그 회사의 부사장이 한국을 ...
입력:2023-01-09 03:05:01
[역경의 열매] 최성권 (15) 영국서 엉뚱한 제품 판매로 신용 잃고 유럽 사업 큰 난관
최성권 선교사가 2015년 사업차 방문한 멕시코 통신사 ‘텔셀’ 본사에서 현지 직원들과 함께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지분을 투자한다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힘도 덜고 쉬운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젊은 나이에 회사를 죽여놓는 꼴이 되고 만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힘들 바에야 그대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4명의 직원을 데리고 용산에 자리를 잡은 뒤로 중국에 출장을 가는 일이 계속 있었다. 그때만 해도 중국의 현금 결제가 잘 이뤄져 직원들 월급도 제대로 줄 ...
입력:2023-01-06 03: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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